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풍부한 IT인력으로 사업하고, 기름진 땅에서 농사 즐겨요"

2015-07-16 12:58:18 게재

필리핀 세부시스테믹스G-미래안농업연구소 곽상만 대표

혹시 일자리를 찾으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 는 아닌지요.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 를 일으키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필리핀은 무려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크게는 북부의 루손과 중부 비사야, 남부 민다나오, 서부 팔라완등 네 권역으로 나뉜다. 세계적 휴양지 중 하나인 세부는 비사야 제도에 있는 섬이다. 면적 4468㎢의 세부 섬은 눈부신 하얀 해안과 에메랄드그린의 청정 해역 때문에 연중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선단을 지휘한 마젤란이 원주민과의 전투 중 사망한 곳이 바로 세부 동쪽 지역인 막탄 섬이었다. 세부는 남북 길이 250km, 동서 너비 45km의 길쭉한 섬이다. 그를 만난 곳은 세부 섬의 북쪽 끝단인 다안반타얀시(市)의 도미나오 바랑가이(필리핀 기초 자치단체를 구성하는 행정단위)의 한적한 해변에 접한 농장이었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으로 바나나 나무들이 열병식 하듯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길의 초입에 MIRAEAN AGRICULTURE RESEARCH CENTER (미래안농업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돼지우리 앞에서 퇴비를 뒤적이던 그가 흙 묻은 손을 내민다. 필리핀에서 농업연구소와 IT(정보기술) 회사를 운영하는 곽상만(55) 박사다.

 

필리핀 세부 섬에서 IT기업인 세부시스테믹스G와 미래안농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곽상만 박사가 농장직원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졸업한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곽 박사는 국내외 유수대학의 교수자리도 마다한 채 세부에서 IT기업과 농장을 일구고 있다.

 


저 허름한 농부가 정말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박사일까.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에 흙이 덕지덕지 묻은 슬리퍼. 저 사람이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거쳐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일까.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스승이 이끌어주는 대로 MIT 강단에 설 수도 있었고, 자신을 영입하려는 한국의 좋은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들 중 자리를 골라잡을 수도 있었다. 한국의 모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2년 만에 훌훌 털어버렸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필리핀 세부 섬의 궁벽한 시골에서 농사꾼의 차림으로 서 있었다.

2008년 필리핀으로 건너온 곽 박사는 현재 도미나오에서 2헥타르 규모의 미래안농업연구소를 운영하는 일과 함께 세부 시에서 기업이나 조직의 합리적 의사결정 모델을 연구하는 '세부시스테믹스G'를 경영하고 있다. 미래안농업연구소는 열대작물들의 생산성 향상 연구와 함께 열대지방에서 한국 토종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곳이다. 곽 박사는 한국에서 양파와 무, 배추, 고추, 토마토, 쑥갓, 깻잎, 무, 콩 등 10여개 품목을 들여와 시험재배를 하고 있다. 현지 작물로는 파파야와 바나나, 오크라(고추 모양의 열매를 맺는 열대식물), 바톤(긴 띠줄 모양의 콩), 암빨라야(여주), 사탕수수 등을 키우고 있다.

세계적 휴양지 중 하나인 세부는 눈부신 하얀 해안과 에메랄드그린의 청정 해역 때문에 연중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세부 시내에 있는 세부시스테믹스G는 일반에겐 생소한 분야인 '시스템 다이내믹스'를 연구하는 곳이다. 시스템 다이내믹스란 한 마디로 효율적인 기업경영 및 조직운영의 모델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한 기업이나 조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들과 대내외적 변화요인, 시간의 흐름 등을 입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가장 효율적인 작동 모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기술이다. 필리핀 IT전문가 6명을 고용하고 있는 세부시스테믹스G는 현재 모기업인 한국의 시스테믹스G와 연계해 한국과 필리핀의 기업과 연구소, 공기업 등의 효율적인 경영 모델을 연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서울에 있는 시스테믹스G는 지난 2000년 곽 박사와 양신규 박사, 조국현 박사 등 MIT출신들과 성균관대 출신인 정관용 박사 등 한국의 시스템 다이내믹스 전문가들이 함께 설립한 회사다. 현재 시스테믹스G는 곽 박사의 동생인 곽미애 박사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곽 박사의 부인은 한림대학교 간호학과의 곽찬영 교수다. 서울대 1학년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난 두 사람은 결혼과 함께 나란히 미국유학을 떠났다. 지금은 부부가 번갈아 필리핀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20여m 정도 되는 바나나 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농가 건물 한 채 나타났다. 시멘트 벽돌 건물에 함석지붕을 하고 있었다. 곽 박사가 농장 일을 하기 위해 임시 사무소 겸 거처로 지은 집이었다. 작은 방 두 개와 거실,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처마에 잇대어 붙인 긴 차양이 현관 앞에 시원한 그늘을 조성하고 있었다. 곽 박사는 매주 금요일 농장으로 와서 농사일을 보고는 월요일 아침 일찍 세부 시로 돌아간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농장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곽상만 박사가 세부시스테믹스G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부시스테믹스G는 현재 모기업인 한국의 시스테믹스G와 연계해 한국과 필리핀의 기업과 연구소, 공기업 등의 효율적인 경영 모델을 연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저희 세부시스테믹스G에서 저의 비서로 일하던 주빌린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2011년 6월쯤 이었어요. 주빌린이 울먹이면서 저한테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집안 식구들이 모두 길거리에 나 앉게 됐다는 거예요. 사정이 하도 딱해보여서 대신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2헥타르의 땅을 떼어주더라고요."

때마침 한국에 있는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양파 종자를 개발했는데 테스트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한국의 토종작물들을 들여다가 시험재배를 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농부들로부터 현지 작물들을 키우는 방법도 배웠다. 곽 박사에게 농사는 흥미진진한 놀이요,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었다. 도미나오의 농장은 그의 놀이터이자 실험실이었다. 땅의 놀라움을 새록새록 발견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바나나 250그루, 파파야 100그루를 심었습니다. 앞으로 바나나 1000그루, 파파야 2000그루까지 심는 게 목표입니다. 토란은 300주 정도 심을 예정이고요. 바나나와 파파야, 토란은 서로 궁합이 잘 맞는 작물들입니다. 바나나는 햇빛을 좋아하는 양지식물입니다. 바나나 나무 그늘 밑에서 파파야가 잘 자라고, 파파야 그늘에서는 토란이 잘 큽니다. 식물들도 서로 의지하면서 살더라고요."

미래안농업연구소 일꾼들이 수확한 땅콩을 정리하고 있다.

어디선가 꿀꿀 거리는 돼지소리가 들려왔다. 농장 사무소 근처의 돼지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우리로 접근하는 인기척에 돼지들이 목청을 높이면서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었다. 커다란 암퇘지 2마리였다. 본격적으로 양돈을 시작하기 위해 키우고 있는 씨돼지들이었다. 돼지우리 옆쪽에서 일꾼들이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를 하고 있었다.

"돼지 축사를 짓고 있어요. 돼지 200마리 정도를 키울 수 있는 규모입니다. 앞으로 1000마리 규모까지 늘릴 겁니다. 제가 돼지 농사의 규모를 늘리는 이유는 필리핀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장에서 사용할 퇴비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축사 한 가운데 고랑을 내도록 했어요. 똥오줌을 수거할 수 있도록 약간의 경사를 두었지요. 인공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퇴비만 사용해서 농사를 지을 계획이거든요."

농장 사무소 건너편에 작은 농가가 한 채 있었다. 농장 총지배인인 준과 제인 부부가 살면서 농기구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준의 집 뒤편으로 작은 창고가 딸려 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20인치 TV 크기의 작은 상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엄지 손가락 크기의 앙증맞은 병아리들이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들여온 병아리 인공부화기입니다. 28마리를 한꺼번에 부화시킬 수 있어요. 인공부화기 한 대를 추가로 들여올 예정입니다. 앞으로 비사야 닭 3000마리 정도를 키우려고 해요. 돼지축사 공사를 마친 후 곧바로 양계장 공사를 시작할 겁니다. 농사 일이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 게와 새우 양식도 해 볼 생각입니다. 워낙 깨끗한 바다예요."

더그 라이만 감독의 영화 '점퍼'는 순간 이동 능력을 지닌 인간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순간 이동 능력을 지녔다. 데이비드는 뉴욕이나 도쿄, 로마, 이집트 등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순간이동을 한다. 세부시에 있는 곽 박사의 IT회사인 '세부시스테믹스G'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마치 '점퍼'의 주인공처럼 모든 게 정반대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듯 이상한 착각이 일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타임머신 '드로이안'을 타고 과거에서 미래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세부시스테믹스G 건물은 세부 시내 바닐라드 거리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의 2층에 입주해 있었다. 4박5일 동안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세부시로 돌아오니 마치 원시생활에서 문명으로 귀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0㎡ 정도 되는 사무실엔 시원한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고, 휴대전화의 와이파이 신호도 강하게 잡혔다.

곽 박사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하나씩 소개시켜 주었다. 총괄매니저인 글렌과 마케팅 매니저 론, 프로그래머 애드리안, 웹 디자이너 미니파이, 한국인 매니저 김진홍씨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글렌과 론은 세부의 명문대학인 산카를로스대학의 교수를 겸직하고 있다고 했다. 세부시스테믹스G에서는 디젤 자동차의 매연저감 프로그램을 세부시에 적용하는 모델링 작업과 세부시의 건설사업에 따른 환경 및 교통영향 평가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세부 섬 북부 다안반타얀시 도미나오의 마야항에서 주민들이 갓 들여온 물고기들을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한 인생을 살면서 전혀 다른 두 개의 삶을 살 수도 있을까. 물론 세상엔 2~3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제법 있지만, 곽 박사처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도 어느 한 쪽을 부업의 개념으로 두지 않고 양쪽 모두를 동등한 비중으로 대하는 두 개의 삶을 사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2008년 초, 곽 박사는 시스테믹스G는 국방부 산하 모 연구소에서 발주한 30억 짜리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를 했다. 분석용 전쟁게임 시뮬레이션과 관련된 프로젝트였다. 시스테믹스G의 연구소장 이었던 곽 박사는 3개월 동안 매일 밤샘 하다시피 시뮬레이션 작업에 매달렸다. 최종까지 경합을 하다가 아쉽게도 경쟁사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필리핀 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세부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작은 형님 집에 머물면서 얼마간 쉬다 올 작정이었다. 지친 심신을 달래면서 시스템 다이내믹스 방법론을 정리하는 집필 작업을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다보니 세부의 구석구석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세부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넘쳐났다. 세부에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산카를로스대학이 있다. 1595년 가톨릭 예수회에서 설립한 이 대학은 비사야 지역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중동지역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온다. 곽 박사는 산카를로스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서 배출하는 인재들에 주목을 했다. 산카를로스대학 출신의 IT 전문 인력들은 탁월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필리핀에는 이들 인재를 필요로 하는 IT기반의 기업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훌륭한 인재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데 결정적인 애로점이 있었다. 일껏 인재들을 키워놓으면 금방 이직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대기업이나 큰 연구소, 대학 등에서 귀신처럼 알고 핵심인력을 쏙쏙 빼내가고는 했다. 어느 해인가 핵심인력 3명이 한꺼번에 빠져 나간 적도 있었다. 불현듯 필리핀의 젊은 인재들을 다듬으면 뭔가 만들어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질을 갖춘 IT인력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인건비로 고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2011년 3월, 마침내 곽 박사는 시스테믹스G의 자회사인 세부시스테믹스G를 설립했다. 영어까지 구사하는 양질의 IT전문 인력을 채용해 본사인 시스테믹스G에서 필요로 하는 프로그래밍 작업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제가 직접 공들여 가르쳐 놓은 필리핀 젊은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필리핀에서는 세부시스테믹스G 만큼 대우를 해주는 곳이 없으니까요. 비로소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 거지요. 더 근본적으로는 제가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시스템 다이내믹스 연구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경의 의미가 희박해 진 지 오래다. 자동차나 전자, 섬유 등 장치산업들조차도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이사를 다닌다. 하물며 컴퓨터 몇 대만 있으면 돌아가는 IT기업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곽 박사는 한국에서 나서 자라고,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필리핀에서 기업을 하고 농사도 짓는다. 지구는 삶을 도모하는 커다란 체스판이다. 모름지기 21세기를 사는 지구인이라면 글로벌하게 사고하고, 글로벌하게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곽 박사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 아닐까.

["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연재 보기]

박상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