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⑧ 최은석 전 대우조선노조 위원장

"회유·폭행·납치 딛고 인간존엄 지켰죠"

2017-09-01 12:25:38 게재

노조결성 시도→해고 되풀이 … "유학 보내주겠다" 유혹 뿌리쳐

1987년 7월 현대그룹 노조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투쟁 열기가 경남 거제 대우조선으로 확산됐다. 그 중심에는 회사 측의 폭행과 납치, 회유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킨 최은석(62) 전 대우조선노조 위원장이 있다.

최 전 위원장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이끌려 천주교 신자가 됐다. 1979년 군복무를 마치고 10월 경남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삼양광학에 입사했다.

그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1980년 초부터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됐다. 신문, 방송에서 가끔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소식도 전해졌다. 3월 중순 노동자 사이에서 임금 인상 문제 등으로 회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한국노총 금속노조 경남본부(경남본부)의 도움을 받아 4월 10일 30여명을 발기인으로 노조를 결성한다. 위원장(분회장)으로 최은석을 뽑았다. 노사협상에서 20여개 요구사항을 대부분 쟁취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이 차근차근 진행되던 8월 중순, 경남본부 조직부장이 울면서 “노조를 해산해라”며 “해산하지 않으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다”고 알려왔다. 결국 노조는 해산됐고, 회사는 최은석 등 발기인 30여명을 해고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최은석은 같은 공단 코리아타코마조선소 부설 직업훈련소 훈련생 과정을 마치고 입사했다. 1982년 5월에는 월급이 좀 더 나은 대우조선으로 직장을 옮겼다. 가톨릭신자인 그는 회사 내 교우회에 열심히 참여했다.

1985년 최은석 자신의 소개로 거제성당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서 활동하던 후배와 노조를 결성하기로 했다. 거제성당 신부에게 대졸출신 통일중공업노조 해고자 문성현(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을 소개받았다. 그는 문성현과 동료 장대현, 구영명, 고 안병진 등과 매주 공부모임을 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동료들과 별도 공부모임을 꾸렸다. 최은석이 만든 모임에는 평생 동지 백순환이 있었다. 모임은 피라미드식으로 만들어졌고, 회사 감시를 피해 점조직 성격을 띠었다.

1987년 초 백순환이 운영하는 공부모임에 소속된 동료가 군대 갈 때가 되자 독자적으로 임금실태, 산재처리 부당성, 퇴직금 지급시일 문제, 통상임금 계산 방법 등 노동법 문제를 제기한 ‘상고문’이라는 유인물 수천장을 현장과 기숙사에 뿌렸다. 이것을 본 공부모임의 구영명이 자신이 2탄을 하겠다고 했다. 최은석이 “9월 노조결성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며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결국 2월 24일 국민저축, 형식적인 노사협의회 등 문제를 지적한 ‘상고문2’가 현장에 뿌려졌다.

근로자의 날 노동자 궐기 등의 정보를 입수한 회사는 최은석과 백순환 등 20여명을 전국 하청업체로 파견을 보냈다. 부당전직에 대한 항의도 소용이 없었다. 경기도 부천서 일하던 그에게 동료 10명이 통영 신아조선으로 발령 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위기를 느낀 그는 당초 9월이던 노조결성 계획을 4월 19일로 앞당겼다. 하지만 발기인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계획이 알려졌다. 결국 최은석 등 16여명이 해고당한다. 회사는 최은석, 백순환을 납치해 1주일간 설악산 한 호텔에 감금하고 회유한다. 감금에서 풀려난 최은석 등은 '10년 회사 밖에서 싸우자'고 결의하고 원직복직 투쟁을 하며 6월 항쟁에도 적극 참여한다.

8월 8일 대우조선 중기사업부 크레인기사 이 모씨가 크레인에 현수막을 내걸고 핸드마이크로 요구사항을 외치자 순식간에 1만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날 결성된 노조 임시집행부였던 이씨가 “불순세력이 회사 내에서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하자 중기사업부 양동생이 반박하면서 공개토론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씨가 노조설립신고서를 “회사 총무부장에게 넘겨줬다”는 소문이 퍼졌다. 노동자들은 이씨에게 “어용이다”며 야유를 보내고 양동생을 임시대표로 뽑았다. 8월 10일 정식 조합장 선거에서 양동생이 위원장으로 당선되고 새 집행부를 꾸렸다. 8월 11일 거제 군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고 합법적인 대우조선노조가 탄생했다.

새 집행부는 임금 7만원 인상 등 14개 요구사항을 내걸고 투쟁을 시작하자 회사는 폐업공고를 냈다. 대우조선 노동자와 가족들은 경영진이 있는 옥포호텔에서 노조 요구를 수용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8월 22일 오후 경찰과 대치하던 이석규 조합원이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 노무현 변호사 등 부산·경남지역 재야인사들이 대우조선 문제에 참여하고 26일 임금협상이 타결된다.

하지만 28일 이석규 열사 장지 문제로 노동자들은 경찰과 다시 충돌한다. 장례 후 광주 망월동 묘지로 운구 되던 시신을 전투경찰 2500여명이 탈취한 것이다. 경찰은 이 열사의 시신을 고향인 남원에 매장했다. 이때 최은석은 구속됐다가 88년 2월에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언제 복직됐나.

1989년 임투 때 처음으로 노조결성과정 해고자 복직안건이 채택돼 노조는 그 이전에 타협이 이뤄진 사람들을 제외한 남은 3명의 복직투쟁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섭결과는 ‘최은석, 백순환 등 3명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직접 협상“으로 합의했다. 김 회장과 협상에서 절대 거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건 나는 1년 기한으로 대우조선 비서실 발령에 합의했다. 다른 동지들은 6개월 또는 1년 기한으로 다른 업체로 갔다. 김 회장 수행비서로 1년간 지내다 1990년 9월에 원직인 방위사업부서로 복귀했다. 1991년 초 골리앗크레인 점거 투쟁과정에서 세번째 구속돼 7월에 집행유예로 나왔다. 이를 이유로 회사로부터 무기정직을 받았다. 10월 동료들의 요구로 노조위원장 선거에 나가 5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조선업종노조협의회 초대 의장, 대우그룹노조협의회 의장,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의장을 하면서 민주노총 건설에 참여했다.

■회사로부터 회유, 폭행, 감시, 납치, 감금 등을 당했다.

80년 삼양광학 분회장 시절 회사 사장. 89년에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회사는 “공부시켜주고 유학을 보내주겠다” “거제만 떠나라 평생 먹고살 수 있게 해 주겠다” 등으로 끝없이 회유했다. 원직 복직투쟁에서 수없이 시 외곽에 버려지고 집은 감시당하고 설악산까지 납치됐다. 가장 심한 경우는 1989년 임투 상황실장을 할 때였다. 5월에 이상모, 박진석 조합원이 구사대 조직인 ‘상록회’ 결성에 반대해 ‘노노싸움을 일으키지 말라’며 분신,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회사는 관변단체를 동원해 노조파업 반대 집회를 열었다. 상황실장으로 상황을 파악하던 중 전과자 출신의 ‘갱생회’ 회원들이 “저놈이 빨갱이이다”며 달려들어 갈비뼈가 부러지고 똥을 쌀 정도로 맞았다. 그리고 나를 시내 모 여관에 감금했다. 내가 납치됐다는 소식에 조합원들은 거제시청에 모여 나를 내놓으라며 집회를 열었다. 납치자 중 1명이 회칼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경찰에 의해 풀려났다. 경찰은 조합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나를 들것에 실려 병원이 아닌 시청으로 데려갔다. 나는 조합원들에게 “나를 납치하고 때린 갱생회 회원보다는 이들을 조정, 배후한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기절했다. 결국 감시, 폭행, 납치 등 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아내가 스트레스가 심해 창원으로 이사해야 했다.

■ 직장도 창원에 있는 동명중공업으로 옮겼다.

1995년 3월 거제를 떠나 창원에서 장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사표를 냈다. 온갖 회유에도 안 나가겠다고 버티던 사람이 스스로 사표를 내자 놀랬는지 임원이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며 창원에 있는 계열사인 동명중공업 사무직 대리로 가라고 했다. 기능직을 원했으나 회사 밖보다 안에 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받았다.

동명중공업에는 노조가 있었고 조합원 가입범위가 대리까지였다. 입사 날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는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옮겼다. 1996년 12월 국회에서 개악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되자 다음날인 26일 출근하자마자 즉시 파업을 주장했다. 동명중공업이 아침부터 파업한 5개 노조 중 하나였다. 2월 회사는 나를 과장급 공장장으로 승진시켰다.

조합원들을 설득해 97년 조합원 가입범위를 차장까지로 넓혔다. 외환위기(IMF)로 고용불안을 느낀 차장급들이 대부분 노조에 가입했다. 나중엔 단체협약 사항에 비정규직을 10% 이하로 사용제한하고 사무직에서 생산직으로 전직을 희망하면 무조건 들어주는 조항이 생겼다. 2003년 기능직을 자원해 말단으로 근무하다 2013년 말에 57세로 정년퇴직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연재 보기]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한남진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