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⑪ 조성호 전 한국일보노조 위원장

언론사 최초 합법노조 결성 후 '울컥'

2017-09-19 12:06:06 게재

1980년 광주현장 취재하고도 보도 못한 회한 풀어 … 동아·중앙 등 언론사 노조결성 물꼬 터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일보에서 시작해 신문 방송 통신 등 언론사 노조결성으로 확산됐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언론민주화와 언론노조운동의 중심에 조성호(73) 전 한국일보노조 위원장이 있다.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출신인 조성호는 대전고를 거쳐 1964년 서울대 천문기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시위', 1967년 6월 8일 총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 등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대학생활 4년 중 3년을 박정희정권의 휴교·조기방학으로 보냈다.

조성호는 군 병역의무를 마치고 1973년 1월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6개월의 견습생활을 마치고 외신부(현 국제부)에 배치됐다. 그해 8월 8일 조성호는 외신 텔렉스(Telex) 당번으로 근무했는데 일본 도쿄발로 '김대중 납치'를 알리는 긴급뉴스가 들어왔다. 세계적인 사건으로 긴급 호외라도 내야 할 판이었지만 군사정권의 사전통제로 한 줄의 기사도 내지 못했다.

박정희정권은 자율규제, 언론정화라는 이름으로 사전검열제, 보도금지, 취재제한, 기관원 언론사 출입, 정간·폐간, 언론인 숙정 등 언론을 통제하고 탄압했다. 이런 대가로 군사정권은 언론에 언론매체 복합소유, 레저·문화·주택건설사업 등 타업종 진출 허용, 언론인기금 지원 등 '당근'으로 순치시켰다.

이런 가운데 1974년 자유언론선언과 언론노조 결성이 터져 나왔다. 3월 6일 동아일보 32명의 기자들은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를 결성했다. 동아일보노조는 이후 해직파동, 노조설립신고서 반려 등 풍파를 겪었다.

10월 22일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월남(베트남) 순회특파원이 쓴 티우정권 부패상을 보도한 것을 문제 삼아 한국일보 편집국장 등을 연행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이에 항의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이어 24일 오전 동아일보 180명 기자가 3차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오후에는 한국일보 150명 기자가 '민주언론수호결의문'을 발표했다. 두 신문 기자들의 선언은 전국 31개 신문 방송 통신으로 확대됐다.

한국일보 사측은 박정희정권의 압력으로 보복인사를 단행했다. 이에 한국일보 31명 기자들은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극비리에 전국출판노조 한국일보지부를 창립했다. 조성호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편집국 노조가입자는 2주 뒤 200여명에 달했다. 한국일보사측은 이창숙 지부장을 무단결근을 이유로 9일자로 소급해 해고하고 조성호 등 외신부 기자 9명에게 경고조치했다. 서울시는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이 사건 후 박정희정권은 자유언론실천요구가 분출하고 있던 동아일보에 광고탄압을 자행하면서 사측이 1975년 3월 기자 피디, 아나운서 등 163명을 강제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일보사측도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인 33명을 파면 또는 해고했다. 해고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조선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구성하고 긴 세월 광야에서 투쟁을 벌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조성호는 사회부 기자로 노동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중 "유혈사태가 벌어진 광주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견습훈련 중인 후배기자와 5월 19일 광주로 갔다. 날이 저물어 도착했는데 광주KBS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진실 보도를 숨기는 언론은 이미 '시민의 적'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에 진입한 5월 27일 다음날까지 10일간 광주에 있었다. 현장 뉴스는 당연히 보도되지 않았다. 조성호는 신문사 복귀 후 편집국에 광주 현장취재 보도를 요구한 끝에 그간의 실제 상황을 내용을 좀 순화시켜 압축 정리한 원고를 냈지만 이것마저도 계엄군부의 검열에 산산조각이 난 채 사장됐다. <참조: 80년 광주, 내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다 http://www.kopf.kr/news/articleView.html?idxno=179288>

그는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보도하지 못한 자책감에 빠져 좌절했고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해 말 언론계에 강제해직 바람이 불면서 곳곳에서 기자, 피디들이 회사에서 추방됐다. 조성호와 5~6명 동료들도 편집국장으로부터 "말 못할 사정이 있으니 회사를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구명됐다. 이듬해 봄 정보당국이 "해직된 줄 알았는데 왜 근무하냐"며 추궁을 해와 조성호는 상당기간 '연금상태'로 내근을 해야 했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잠자던 언론을 일깨웠다. 10월 29일 한국일보 58명 기자들은 서울 종로 YMCA회관에서 최해운을 위원장으로 뽑고 전국출판노련 한국일보노조를 창립했다. 언론사 최초의 합법노조였다. 1974년 한국일보노조 주역이었던 조성호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노조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1974년 결성된 한국일보지부의 정통성을 잇겠다"고 밝혔다. 조성호는 '죽지 않고 버티고 살아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국일보 노조결성에 이어 동아일보·중앙일보·MBC·코리아헤럴드 등 언론사 노조결성이 잇따랐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초대 위원장을 극구 사양했던 조성호는 이듬해 10월 2대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일보노조는 1989년 6월 7시간 30분의 파업 끝에 편집국장 임명동의제, 평기자가 제작에 참여하는 편집평의회 구성, 임금 16% 인상, 편집국-비편집국 단일호봉제, 퇴직금누진제 등 큰 성과를 거뒀다. 그는 2002년 정년퇴직했다.

■ 오랜 기간 언론민주화, 언론노조운동을 했다.

30여 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군사정권의 언론통제로 사실을 보도하지 못할 때 계속 '기자를 해야 하나'하는 갈등, 좌절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심한 우울증으로 아내의 성화에 '안수기도'까지 받았다. 강준만 교수는 1990년대 말 한국언론 115년사(1883~1998년)를 펴내면서 우리 언론의 슬픈 자화상의 상징으로 책제목을 '카멜레온과 하이에나'라고 붙였다. 늘 권력의 탄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변신을 거듭해야했던 대상을 '카멜레온'으로, 떠오르는 권력을 추켜세우고 쓰러지는 권력은 짓밟는 대상을 '하이에나'로 부른 것이다. 나 자신도 저항을 했지만 여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언론민주화, 언론노조활동을 통해 좌절감이 극복되고 값진 인생의 교훈도 얻었다.

■ 언론노조 결성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8년 4월 6일 15개 언론사 노조가 참여해 언론사상 처음으로 전국조직인 전국언론사노조협의회(언론노협)가 창립됐다. 이를 기반으로 그해 11월 26일에는 전국 41개 언론사 노조가 모여 전국언론노조연맹(언론노련)이 발족했다. 이때 선임 부위원장을 맡아 신문 방송 등 언론사 노조 지원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2000년 11월 24일에는 125개 기업별 노조를 하나의 노조로 통일시킨 전국언론노조(언론노조)로 재출범했다. 언론노조는 전국의 신문 방송 출판 인쇄 등의 매체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가입한 단일 산업별노조다. 언론노조 초기 모토인 '언론해방'을 제안했다.

■ KBS·MBC 노동자들이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있다.

KBS·MBC 노동자들의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 현장 등에서도 지지활동을 벌이고 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선결적 자유다. 언론민주화는 모든 민주화를 이루는 선결적 민주화다. 언론자유와 언론민주화는 언론인 스스로가 투쟁을 통해 이뤄야 하고 스스로 지켜내야 한다.

■1960년 4·19 이후에도 언론노조운동이 있었다.

4·19 이후의 민주적 분위기 속에서 5월 15일 대구일보 노조결성을 시작으로 6월 연합신문과 평화신문 노조결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맞아 자취를 감췄다.

■ ‘새언론포럼’ 창립에도 산파역할을 했다.

1996년 봄 제3자개입금지 혐의로 구속됐다가 출옥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언론노조운동 출신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1997년 11월 25일 참언론 실천과 언론노조운동의 현장에서 뜻을 함께했던 전·현직 중견언론인들이 모여 ‘새언론포럼’을 창립했고 초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새언론포럼은 비민주적 언론구조 개혁운동, 시사현안에 대한 정책토론회, 언론민주화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4년 8월에는 새언론포럼을 포함해 언론노조, 80해직언론인협의회, 민언련, 언론연대, 피디연합회 등 10여개 언론시민단체가 함께 ‘자유언론실천재단’도 설립했다. 감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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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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