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⑫ 강기석 전 경향신문노조 초대 부위원장

'무임승차' 부채의식에 더 치열하게 싸웠다

2017-09-28 12:21:09 게재

정치권 눈치 보느라 1988년 3월에야 노조결성 … 관영→재벌→독립언론으로 탈바꿈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에 뒤이어 신문, 방송 등 언론사에도 노조결성이 봇물을 이뤘다. 언론사 중 경향신문은 한국이나 동아 보다 조금 늦게 노조결성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무임승차를 했다'는 생각에 더 치열하게 언론자유 쟁취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강기석(63) 경향신문노조 초대 부위원장이 있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6월 민주화 항쟁 과정 중에 겪은 가슴아픈 경험이 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시위군중들이 다른 지역으로 배송하기 위해 서울역에 대기하고 있던 경향신문을 불태워버린 것. 충격을 받은 기자들은 기자평의회를 구성하고 편집권 독립을 쟁취해 나아가자고 뜻을 모았다. 강기석이 처음부터 앞장섰다.

'권력과 싸울 수 있는 직업'으로 언론 택했지만 = 강기석의 원래 꿈은 외교관이었다. 1972년 건국대 정외과에 입학한 이래 고시공부에만 몰두했다. 그해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됐고 다음해 10월부터 서울대를 시작으로 유신헌법 철폐,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확산됐다.

당시 건국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기석은 '무언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외과 선후배들을 규합해 1974년 11월 1000여명의 학생들과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벌였다. 그는 주동자로 찍혀 30일간 구류를 살았다. 군복무를 마친 강기석은 1976년 3학년 말 외무고시 2차시험에 합격했다. 건국대 최초였다. 하지만 3차 면접에서 2년 전 시위전력으로 떨어졌다. 그의 외교관 꿈은 좌절됐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낀 강기석은 '부당한 권력과 싸울 수 있는 직업'인 언론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77년 12월 경향신문-문화방송에 입사했다. 그러나 언론이 독재와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더구나 경향신문-문화방송은 박정희 대통령의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게 소유권이 있는 관영언론이었다.

당시 언론환경은 1975년 동아·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선언이 압살된 이래 독재권력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사태를 거치면서 실권을 잡은 전두환 등 쿠데타 세력은 더욱 언론검열을 강화했다.

강기석이 꿈꿨던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직업'으로서의 기자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1980년 말에는 광주항쟁을 취재했던 기자들 포함 1000여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되고 44개 언론사가 통폐합됐다. 172종 정기간행물도 등록을 취소당했다. 반면 당근도 달콤했다. 강기석도 언론인금고에서 저리 융자를 얻어 조그만 단독주택을 마련했고, 다시 기자협회 주택사업을 통해 강남 아파트로 이사했다. 취재 보도를 할 때마다 촌지와 향응이 따랐고 외국 여행도 자주 갔다. 그러다가 1983년에는 언론재단 해외연수기금으로 단기(1년) 캐나다 연수를 가게 됐다. 그것이 그의 언론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어느 날 한 교민의 저녁 초대자리에서 강기석은 '광주사태' 비디오를 봤다. 최근 절찬리 상영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힌츠페터 기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찍은 영상을 편집한 것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참혹한 광주의 진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던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철권 같았던 전두환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KBS시청료거부운동, '언론보도지침' 사건,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채찍과 당근에 순응했던 기자정신, 직업윤리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향신문이 불태워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한화, 인수조건으로 1기 노조집행부 해고 요구 = 경향신문 기자들은 기자평의회를 만들어 무엇이 문제인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밤새워 토론하며 해결방안을 찾았다. 해답은 편집권 독립이었다. 그러나 편집국 간부와 경영진들은 "제대로 신문을 만들어 보자"는 후배들의 요구를 회피하거나 묵살했다. 기자들은 편집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법적 보호를 받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10월 19일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중앙일보·MBC·코리아헤럴드 등에서 잇따라 노조가 결성됐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더뎠다. 관영언론이었던 경향신문 구성원들이 조직내부의 관계보다 정치권 등 밖의 눈치를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18일 드디어 경향신문에도 노조가 결성됐다. 초대 위원장에 고 이성수를 뽑고 강기석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정권의 탄압이 시작됐다. 노태우정권은 경향신문에 대한 지원을 끊고 재벌에 넘기려는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LG가 나섰다. 노조는 LG가 경향을 인수하려면 먼저 편집권 독립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영진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파업에 돌입했다. 노조의 저항에 놀란 LG가 손을 뗐다. 한화가 다시 나섰으나 역시 편집권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인수작업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경영난이 가중돼 임금을 지불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됐다.

회사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노조에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때 한화 측에서 인수조건으로 1기 노조 집행부 해고를 요구해 왔다. 결국 1989년 12월 경향신문 경영진은 이성수 노조위원장, 강기석 부위원장 등 노조간부 5명을 해고한 뒤 한화에 지분을 넘겼다. 1980년 대량 해직사태 이후 언론사 최초의 해고가 경향신문에서 자행된 것이다.

강기석 등 해고자들은 언론노련에서 숙식을 하며 출근투쟁을 하고 해고무효소송을 냈다. 100일 출근투쟁을 마친 후 해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강기석은 1990년 새로 출범한 평화방송에 입사했다. 동아투위 선배들이 주축이 된 평화방송에서 제대로 된 언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곧 무산됐다. 강기석은 평화방송에서도 편집권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결국 파업사태가 벌어져 그는 배후 조종자로 몰려 구속됐고 평화방송 사측은 그를 해고했다.

한화 철수 뒤 노조가 앞장서 독립언론 만들어 = 1991년 9월 5명의 경향신문 해고자들은 해고무효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모두 복직했다. 한화 경영진은 대부분 기업들과 달리 복직자들을 경계하고 핍박하는 대신 이들을 주요 직책에 등용해 신문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했으나 끝내 재벌언론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1998년 천문학적 적자에 허덕이던 한화는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기자 등 조합원들은 한화가 손을 뗀 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독립언론을 만들자는데 뜻을 모으고 퇴직금 일부를 투자해 사원주주회사를 출범시켰다. 강기석은 "경향신문이 관영·재벌언론에서 독립언론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초창기 노조활동의 경험이 절대적인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언론노동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일반 사업장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상품의 질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는다. 일부러 불량품을 만드는 회사는 없겠지만 만일 식품회사에서 사주가 소비자에게 해가 되는 불량식품을 만들라고 요구한다면 노동자는 저항할 것이다. 언론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언론노동자가 만드는 상품, 즉 뉴스를 불량하게 만들도록 강요받는다면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그래서 언론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이라기보다는 언론운동의 성격을 더 많이 갖는 것 같다.

 노조결성한 지 30여년이 됐다.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했다. 초창기 노조정신이 많이 없어졌다. 신문 쪽 언론노동운동은 비참할 정도다. 일부 신문사는 아예 어용이 돼 임금이나 근무조건 등에만 신경 쓴다. 그나마 방송노조가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어 다행이다. KBS, MBC 노동자들이 공정방송과 적폐청산을 위해 싸우고 있는데 꼭 이겨야 한다. 초창기 때처럼 언론 노조운동이 언론계 전반적인 언론자유운동으로 승화돼야 한다.

 예전에 비해 언론사가 이념적으로 갈라졌다.

굉장히 바람직하다. 예전에는 서로의 구분이 없었다. 1면 기사내용이 똑같았다. 이제는 신문 소유구조 차이로 인해 논조가 달라진다. 이른바 보수신문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보수인가. 억지와 왜곡이 판치는 수구에 불과하다. 진보신문은 좀 더 정교하고 흔들리지 않는 스텐스를 유지해야 한다. 수구세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진보의 스텐스가 흔들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도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지만 중도를 추구하는 스텐스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해석은 자유이지만 어떤 경우에든 진실 보도가 기본이다.

 언론인으로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언론노조운동의 목표가 권력으로부터 독립, 자본으로부터 독립 그리고 자기 비리로부터 독립이다. 자기비리로부터 독립은 단순히 촌지나 향응을 받지 말자는 차원이 아니라 기자, 언론 노동자로서 전문성, 독립성, 객관성,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을 항상 추구하자는 의미다. 기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가능하겠는가. 자기비리로부터 독립이 안 돼 있으니 ‘기레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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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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