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② 임시정부 대통령·임시의정원 의장 첫 탄핵

임시의정원, 헌법 거스른 이승만을 헌법절차로 끌어내리다

2019-03-07 11:26:38 게재

1919년 9월 대통령 선출 이후 5년간 불신임 유고 탄핵 등 의정원 결정 부정

임시정부도 부정 … 탄핵 → 면직 변경

결국 탄핵 됐다.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처절하게 버텼고 임시의정원도 의결해놓고 번복하기도 했다. 무정부상태를 누구든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거점인 임시정부에 이승만 대통령은 걸림돌이었다. 3.1운동 독립선언문에서 밝힌 '독립'을 향한 노력에 이승만 대통령의 부재는 분열만 키웠다.

1925년 3월 18일 밤 탄핵안 통과는 큰 무리없이 통과됐다. 특별한 이견도 없어 보였다. 이미 이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3월 14일에 헌법절차에 따라 곽헌 최석순 문일민 임득산 강경선 나창헌 강창제 김현구 고준택 등은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의정원에 제출했다.

이승만 대통령 상하이 도착 환영식 임시의정원과 내각으로부터 상하이 부임 촉구와 불신임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선출 1년3개월만인 1920년 12월 28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성대한 환영식이 있었고 1921년 1월부터 첫 업무를 시작, 국무회의도 열었지만 내부 분열을 더욱 악 화시켰다. 자료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이후 나창헌(위원장) 최창식 곽헌 위원 등 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심판위원회는 곧바로 탄핵 조사에 들어갔다. 탄핵심판서에는 헌법에 명시한 임시정부 소재지에서 직무해야 한다는 대목을 무시했다는 점을 짚어냈다. 그러고는 국무원을 통한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지적했다. 임시의정원 결의 부정, 임시정부 정통성 부정 등 국정 방해와 국헌 부인을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이유로 제시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임시헌법 21조 14항에 의해 탄핵안을 통과시킨후 심판에 맡겼다. 심판위원회는 '탄핵'을 '면직'으로 바꿨다.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이후 면직 결의안은 23일에 통과됐다.


◆출발부터 삐걱 = 1919년 3월 1일 3.1운동 이후 한달여만인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한성정부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신채호 등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위임통치청원 문제가 핵심이었다. 독립을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전초기지인 임시정부의 수장에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해 달라'며 미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보낸 인사를 앉힐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위임통치청원은 이승만 반대파의 근저에 깔려있는 핵심논리가 됐다. 이승만은 같은해 9월 11일 3개의 임시정부가 통합된 이후 첫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위임통치청원문제를 해소하지 못했다.

'대통령 없는' 임시정부가 이어지면서 많은 문제들이 새어나오자 임시의정원에서는 이유필 등 17명의 의원이 나서 '이 대통령 상하이 부임 촉구 결의안'(1920년3월)을 제출했다.

불만은 내각에서 더 크게 나왔다. 두달 후인 같은해 5월에 김립 등 차관들이 임시대통령 불신임을 결의했다. 이 대통령이 12월말에 상하이로 들어온 후 6개월만에 분란만 일으키고 훌쩍 떠나버렸다. 각료들이 나서 공개적으로 이 대통령에게 사퇴를 종용했다.

◆번복된 불신임 = 각료의 불신임과 사퇴요구에도 이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다. 임시의정원이 본격적으로 '이승만 퇴출'에 나섰다.

1922년 6월 12일에 대통령과 국무원(내각) 불신임안이 상정됐다. 오영선 의원이 제안했다. 그는 △내정을 통일하지 못하고 △외교와 조각 실패를 들어 5일 만에 가결됐다. 논란이 적지 않았다. 결국 찬성 12표로 통과됐다. 대안없는 무정부상태를 임시의정원이 버텨내지 못했다. 한달도 지나지 않은 7월 6일 김용철 의원이 "대통령 및 각원 불신임안 결정이 우리 독립운동 진행상에 장애되는 문제이므로 취소하자"고 하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가결됐다. 다시 이 대통령에 권한이 주어졌다.

이승만 탄핵 호외 |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5년 3월 호외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탄핵을 알렸다. 이 호외 기사는 대통령 이승만 면직, 새 대통령 선출, 국무원 동의안 통과 등 이승만 대통령 탄핵사실을 자세하게 기술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탄핵안까지 만들고 폐기 = 1923년엔 이승만 탄핵이 시도됐다. 11회 임시의정원은 4월 2일 조덕진 등 9명이 내놓은 대국쇄신안을 의결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당시엔 26명의 의원을 보선했는데 이들이 대부분 서북지방 출신으로 '반이승만파'에 속했다. 임시의정원이 '여소야대'가 된 셈이다.

그러나 쇄신안 결의로 탄핵시킬 수는 없었다. 1919년 9월17일에 개정된 임시의정원법에 의하면 임시대통령 탄핵안은 총의원 5분의 1의 연서와 무기명 투표, 탄액안 가결후 5일 이내 심판을 규정해놨기 때문이다.

조덕진 등 12명은 탄핵안을 서명, 제출했다. 그러나 폐기됐다.

1924년엔 임시의정원이 사실상 반이승만파 의원들의 주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월 28일 윤기섭 의장 사임한 후 조상섭 의장, 여운형 부의장 체제로 전환됐다.

반면 이승만은 4월 5일 임시의정원에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임시의정원은 16일에 임명동의안을 토의, 22일에 임명동의에 나섰고 이동녕 국무총리는 23일에 취임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은 각료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동의없이 친이승만인사들로 '대리내각'을 만들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임시의정원 조상원 등 8명은 이승만이 귀환하지 않으면 유고로 보고 임시헌법에 따라 국무총리가 직권대리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한 유고안을 6월16일에 제출, 가결시켰다. 9월1일에 이 사실이 공포되면서 이 대통령의 권한이 사라졌다.

1924년 12월 이동녕 내각이 총사퇴하고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승만 탄핵은 사실상 기정사실화됐다. 박은식 내각은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때 사퇴했거나 이승만 불신임안을 주도했던 인사를 중심으로 꾸려졌다.

(이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한시준의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독립신문 등을 참조한 것이며 한시준 단국대 교수의 조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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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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