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⑤ 임시의정원 사료를 찾아라

공식회의록은 1931년이후만 … 일제 뺏어가고 전쟁에 불타고

2019-03-28 11:35:23 게재

기사록·독립신문·홍진문서가 전부

미수로 그친 박열(1923년)의 일왕 폭살 거사를 이봉창이 실행했다. 1932년 1월8일 오전 11시44분경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방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하고 경시청 앞을 지날 대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아 실패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은 윤봉길이었다. 같은 해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천장절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 고위 장성들이 죽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 청사가 일제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많은 사료들이 사라졌다.

문희상 의장, 홍진 후손과 만나 | 미국을 공식방문 중인 문희상 국회의장은 현지시간 2월 14일(목) 뉴욕에서 홍진(1877∼1946) 임시의 정원 의장의 손자며느리인 홍창휴 여사와 오찬을 함께하며 면담을 가졌다. 사진 국회의장실 제공


임시정부는 상해(1919~1932년)에서 잃어버린 문서를 정비하고 이동기(1932∼1940년), 충칭기(1940∼1945년)의 서류를 모아 광복후 환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다. 임시정부(행정부) 10상자, 임시의정원 3상자 등 모두 13상자로 추렸다. 그러나 한국전쟁때 모두 잃어버렸다.

의원당선증(1941년). 자료 국회도서관 제공

◆임시의정원은 국회의 전신 = 임시의정원의 중요도에 비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1919년에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처음으로 '국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점에 주목하면 임시의정원은 국회의 전신이다. 헌장 10조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돼 있다. '임시의정원'이 독립 후엔 이름을 바꿔 '국회'로 불릴 것이라는 예고탄이 명시된 셈이다.

1998년 국회에서 내놓은 '대한민국 국회오십년사'에서도 임시의정원을 국회의 전신으로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년)

1970년과 1971년에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독립운동사자료'(1·2)를 내놓았다. 자료 1권은 홍진문서의 회의록을 실었고 2권은 독립신문 등에 보도된 임시의정원 관련 기사를 담았다. 1974년 국회도서관은 임시의정원 회의록과 관련 문서를 정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를 편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5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5권(임시의정원 Ⅰ~Ⅴ)에 임시의정원 회의록과 관련 문서를 포함했다.

◆공신력 있는 건 '홍진 자료' = 단비가 내렸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한 홍진선생이 해방 후 환국 당시 임시의정원 문서 1536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군무부 공작보고서(1945년). 자료 국회도서관

홍진 선생의 유족들이 6.25전란 중에도 끝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1967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공식 문서는 오로지 홍진 선생이 보존한 임시의정원 관련 문서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진 선생이 기증한 임시의정원 문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 원본과 해방 후의 대한민국 재건계획을 담은 건국강령, 당시 의원 당선증, 광복군 작전보고, 1944년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하여 실제 사용된 한국기 우표 등이 있다. 또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채택된 각종 결의안, 선언서, 예산결산서 등의 문서와 광복군 편성을 위한 군무부 보고 등 임시정부와의 왕래문서도 들어있다.

◆빈약한 의정원 자료 = 임시의정원 공식문서는 요지만을 정리한 기사록, 독립신문의 기사와 속기록 발췌내용, 홍진문서의 회의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1일 제1회를 개최한 이래 1945년 8월 17일 임시의회까지 모두 39회에 걸쳐 열렸다. 한국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임시정부 수립 당시, 즉 1919년 6회에 걸친 기사록이다. 1920~1925년까지는 임시의정원 회의 내용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6년 회의내용은 임시정부 공보에 의존하고 있다. 1931년부터 이뤄진 임시의정원 활동은 홍진 선생이 기증한 문서에 기대고 있다.

1934년의 상임위원회 회의록과 1942·1943년의 약헌수개위원회 회의록, 1944년의 건국강령수개위원회 회의록은 광복 직전의 상황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비밀회의와 전원위원회의는 회의록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지만 확인된 게 없다. 일반 회의에 관한 것도 1925∼1930년과 1938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1920년대 후반기 임시정부 침체기의 실상은 제대로 조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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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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