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⑥

의정원 예산감시권이 임시정부 살림 챙겼다

2019-04-04 11:17:36 게재

빠듯한 독립자금도 감시 … 임정, 독립된 '회계검사원' 운영

1919년7월8일 첫 결산안 심사 … "다시 제출하라" 돌려보내

1941년 예산규모 61만6977원 … 27년 임시정부 버팀목 역할

1919년 7월 8일 첫 결산안 심사가 이뤄졌다. 임시의정원이 설립된 4월 11일 이후 석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제 5회 회의였다.

첫날엔 예산결산위원회를 만들었다. 오의선이 위원장이 맡았고 유정근(현재 간사와 같은 이사), 백남규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신규식의 호소 | 1921년 10월 20일, 신문 '태평양일간'에 실린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신규식이 임시국무총리 대리로서 중국 국민을 향해 호소한 글 사진 국회도서관 제공

7월 13일에 오 위원장은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제출한 결산안을 본회의에 보고했다. 이 결산안은 4월20일~7월30일까지 지출한 경비였다. 그러나 본회의에서 강하게 질책을 받았다.

신익희가 "결산안이 심히 불충분해 재무부에 돌려보내 다시 제출토록 하라"며 의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병조가 재청, 가결됐다. 첫 결산심의가 힘없이 마무리됐다. 임시정부가 결산안을 다시 제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25일에 만든 임시의정원법엔 재정에 관한 3가지 권한을 넣었다.

정부의 예산·결산의결권(제2항), 전국의 조세·화폐·도량형의 준칙의결권(제3항), 공채모집과 국고부담에 관한 의결권(제4항)등이다.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지켜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재중자유한인대회 총주석자격 홍진 선생 연설사진(1943년)


◆힘들었던 임시정부 = 임시의정원의 예결산 심의권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지휘 감독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이었다.

임시정부의 재정정책과 운용 결과는 독립운동의 성과와 직접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투명하고 엄정한 집행이 요구됐다. 정부의 재정을 심의 감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시정부 재정상황은 좋지 않았고 관리도 허술했다.

1920년 3월 30일 재무총장 이시영은 '예산·결산을 임시의정원에서 심의할 때 재원의 출원자나 정부재정 규모 등이 일제에게 드러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독립운동 기간 내에는 예산·결산을 정부에 위탁해 달라'는 '예산·결산에 대한 정부위탁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초기재정운영의 허술함을 보여준 단면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이후 이동시기로 접어든 임시정부의 재원은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지원받은 특종수입과 미주동포들이 보내오는 인구세·애국금 등에 의존했다.

임시정부수립 초기의 예·결산심의제도와 재정기구는 1920년대 중반이후 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지면서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다.

1927년 개헌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만 남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이동기'엔 3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가동해 예산외 지출을 승인했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한 이후에야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지원을 매년 받을 수 있었고 미주동포로부터 인구세와 독립금 송금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걷혔기 때문이었다.

1940년 의정원은 1941년도 세입세출예산안을 약간수정하여통과시켰는데,중국정부의지원금을뜻하는'특종수입'50만원과 재미동포들의 의연금 11만300원을 합한 총액 61만6977원 규모로 짜여졌다.

임시정부는 1938년도부터 계속하여'특종수입'으로 50만원을 세입예산에 책정하고 중국정부와 교섭해왔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국국기 미국 우표


◆임시정부는 독립 회계검사원 설치 = 정부는 회계검사원을 특별기구로 만들었다. 임시헌법엔 '회계검사원의 조직과 직권은 법률로써 이를 정한다'고 했다.

회계검사원은 '임시정부의 일체 회계를 검사 확정하며 감독하는 기관'으로 임시대통령의 직할 기관이다. 검사장 1명과 검사관들로 구성된다. 검사관은 다른 관직을 겸할 수 없다. 업무 독립성 보장을 위한 것이다.

회계검사제도가 제대로 가동된 것은 1940년이후였다. 회계검사원은 1943년 3월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잠행관제'에 의해 편성과 기능이 정립됐다.

1944년에 개정한 임시헌장에서는 '국가의 예산결산 및 회계는 검사, 확정한 회계검사원의 보고와 같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하고 회계검사원에서는 '국가의 일체 회계를 수시로 검사'토록 했다.

1944년 8월 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회계검사원에 국가회계 검사권을 부여했다. 임시의정원의 예결산도 국가의 예결산에 속하는 것임으로 임시의정원 회계도 검사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의결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4년 8월 14일 회계검사잠행조례'를 마련, 회계검사원에 관한 규정을 법률로 정했다.

◆조세법률주의 도입 = 임시의정원은 1940년 10월 9일 개정한 임시약헌을 통해 "조세와세율은 법률로 규정"는 조세법률주의를 명시했다.

'국가의 세입세출의 예산결산 및 국채와 기타 국고부담이 될 만한 것은 임시의정원의 의결'로 이뤄지고 '예산초과 혹 예산외의 지출은 의회의 승인'을 의무화한다는 게 골자였다. 1944년 개정된 임시헌장에는 이 내용을 모두 임시의정원의 권한에 넣었다.

임시정부가 27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같은 회계검사제도와 심사제도를 법률화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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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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