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⑬ 격동의 1948년

첫 총선 198명 의원 중 무소속 85명 … 반민법·국보법 통과

2019-06-13 12:33:25 게재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절차 없이 선거법 제정

부통령·부의장 선출, 결선투표에서 결정돼

1948년은 정부를 만든 해로 격동의 시간들이었다.

2월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실시'를 결정했다. 남조선과도입법정부는 의회에 의한 입법절차를 밟지 않고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 공포하면서 제헌국회를 만들기 위한 첫단추가 꿰어졌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위한 수순이었다. 미 군정은 3월 22일 선거법 시행세칙을 발표했고 기독교인들의 요청에 따라 선거일을 일요일인 5월9일에서 하루 늦췄다.

의장단과 헌법기초위원들 | 1948년 7월 12일 헌법제정후 자리를 함께한 이승만 의장, 신익희 부의장과 헌법기초의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자료 국회도서관 제공


첫 총선은 임기 2년의 소선구제로 치렀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진영 인사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5월10일 21세이상 유권자 중 96.4%가 등록했으며 투표율이 95.5%에 달했다. 문맹률이 높아 투표용지에는 후보자 이름대신 세로로 막대를 표시해 기호를 알려줬다. 국회의원 정원 200명 중 폭동이 일어난 북제주(갑·을)을 제외한 198명이 당선됐다. 무소속이 85명으로 가장 많았다. 북제주는 1년 후에 선거를 치렀다.

법적인 임기는 5월 30일부터 시작했다. 제1회 국회 제1차 본회의는 국회선거위원회 소집으로 5월 31일 10시에 일제때 조선총독부청사였던 중앙청 의사당에서 열렸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승만 의원이 임시의장에 추천됐다. 단기, 무기명 투표로 188표의 압도적 지지에 의해 이승만 임시의장이 첫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부의장 후보 신익희, 김동원은 1차 투표에서 각각 76표, 69표를 얻어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2차 투표(116표, 80표)를 거치고 나서야 신익희 의원이 당선됐다. 또다른 부의장 선거에서는 김동원 의원과 이청천 의원이 후보로 올랐으나 1차(77표, 73표)에서 마무리짓지 못해 2차(101표, 95표)투표까지 가야 했다.

곧바로 오후 2시에 유엔과 미군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이 치러졌다. 이승만 의장은 개원사에서 "우리 국회가 우리나라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이라며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한다"고 했다.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도 천명했다.

국회법은 6월 3일부터 기초위원회에서 논의됐다. 나흘만에 전문 10장, 107조로 구성된 초안이 작성됐고 10일에 확정했다. 9월14일에 본의에서 통과됐지만 공포일은 정부수립 이후인 10월 2일이었다.

7월 1일 본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했다. 정부조직법은 헌법기초위원들이 1948년 7월12일 헌법제정 직후 착수, 7월 14일에 본회의에 올려 16일에 가결됐다. 8월 2일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5일 김병노 대법원장 승인 요청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정부수립을 위한 기초작업이 마무리됐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20일에 결정됐다. 196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투표는 오전 10시 25분에 시작해 11시 5분에 끝났다. 개표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서재필)였다. 부통령 선거에는 197명이 참석했으며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가 나왔다. 과반을 넘는 후보가 없어 2차 투표를 실시했다.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이구수 1표, 무효 1표로 이시영 의원이 당선됐다. 취임식은 나흘후인 24일에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은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안'(반민법)을 작성했다.

초안은 본회의에 회부돼 8월 17일부터 제1독회가 이뤄졌고 9월 7일에 가결됐다. 이는 제헌헌법 제 10조 '이 헌법을 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형벌불소급의 예외조항을 둬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반민법은 9월 22일에 통과됐다.

국가보안법 제정도 초반 제헌국회의 민감한 의안이었다. 9월 '내란행위방지법안' 제정 결의안이 통과된 후 10월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11월 11일 국가보안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수차례 폐기동의안이 부결됐다. 12월 1일 국가보안법은 원안대로 공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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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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