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⑮ 제2대 국회 개원 6일만에 한국전쟁

이승만 '국회없는 6개월' 발표, 유엔·미국 압박에 번복

2019-07-18 11:08:37 게재

선거법 제정 후 첫 선거 … '여소야대', 정부 위협

총리인준 잇단 실패 … '내각제 개헌' 찬성 우세

광복 후 첫 개헌 시도는 국회가 시동을 건 1948년 이후 2년이 채 안된 시점에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압바과 반대로 다수가 원했던 내각책임제가 무산된 탓에 다시 꺼내드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개헌안을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서상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이다. 그는 78명의 의원과 함께 내각책임제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1950년 1월27일에 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연임을 막기 위한 민주국민당(전 한국민주당)의 전략이었다. 민국당(당시 한민당)은 제헌헌법을 만들 때도 법학자 유진오를 통해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만들도록 한 바 있다.

제2대 국회전반기 의장단으로 좌로부터 장택상부의장, 신익희의장, 조봉암부의장. 사진 국회 도서관 제공


표결은 제출된 지 한달 보름이 지난 3월14일에 이뤄졌다. 제헌국회 임기를 두달반 남겨둔 시점이었다. 재적 179명 중 78명이 찬성하고 33명이 반대했다. 66명이 기권했다. 무효는 1표였다. 제헌헌법에 의하면 '개헌의결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

◆국회를 멈추게 하려던 이승만 = 이승만 대통령은 제 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국회의원 선거일시를 6개월 후인 11월말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정국이 요동쳤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4월 2일에 "선거연기는 대의정치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며 국내 분쟁은 군사분쟁을 원하고 있는 분자들에 의해 이용당하게 된다"는 내용의 통고문을 냈다. 미국은 "한국정부가 인플레경제의 안정책 마련 및 5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대한 군사, 경제원조를 재고하겠다"는 각서를 보냈다.

1950년 9월 1일에 찍은 임시 의사당으로 쓰인 부산극장. 사진 국회 도서관 제공


이 대통령은 선거일 연기결정을 번복했다. 4월8일 국회의원선거법이 만들어졌고 12일에 공포됐다. 5월 30일 선거가 치러졌다. 새로 제정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실시된 첫 사례가 됐다.

제헌국회와 같이 소선거구제로 최다 득표자 한명만 뽑는 방식이었다. 정원은 200명에서 210명으로 늘어났다. 2209명이 출마해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제헌의회때 보이콧했던 남북협상파도 나왔다. 선거결과는 제헌국회와 같이 무소속이 가장 많은 126석을 가져갔다. 정당정치가 자리 잡지 못했고 정치 불신이 큰 탓으로 보인다.

◆서울→대구→부산→서울, 옮겨다닌 국회의사당 = 여당인 대한국민당이 24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 뒤로는 민주국민당 24석, 국민회 14석, 대한청년단 10석, 일민구락부 3석, 대한노동총연맹 3석, 사회당 2석, 민족자주연맹 1석, 대한부인회 1석, 여자국민당 1석, 중앙불교위원회 1석이었다. 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고 내각제를 반대하는 여권진영 의원이 50여명에 그쳤다. 여소야대 국면은 내각제 개헌 시도뿐만 아니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두 차례나 부결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6월 2일 제헌국회가 폐회를 선언했고 같은달 19일 첫 임시국회를 열어 제2대 국회가 출범을 선언했다.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이 뽑혔다. 신익희 의장은 개원사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우리들의 힘과 책임으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아무런 과오와 분규도 없이 모든 애국정당단체에 소속하는 의원 여러분을 총말라하여 거족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의기관인 이 국회를 구성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개원식을 치른지 6일만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회의사당은 대구 부산 등으로 옮겨가게 됐다. 6월27일 '100만 애국 시민과 함께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를 했지만 이미 이 대통령이 피난을 떠난 뒤였다. 의원들도 남하에 동참했다. 국회의사당은 전쟁 동향에 따라 대구(7월20일), 부산(9월1일), 서울(10월7일)로 옮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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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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