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 이름의 동족 학살, 국회도 못 막아

2019-07-18 11:08:36 게재

'부역처벌법' 힘 못써

6.25 전쟁이후 '부역'이라는 딱지를 붙인 동족 살상이 대대적으로 이뤄졌고 이를 막기 위한 국회의 노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부역'은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적에게 협력했거나 아군에게 위해가 되는 행동을 말했다.

한국전쟁 사흘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두달도 안돼 정부가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려나면서 교도소 재소자에 대한 무차별 처형이 이뤄졌고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 9.28 서울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부역'이라는 이름의 '무재판 처벌'이 자행됐다. 국회는 9월 4일에 제노사이드(인종, 이념 등을 이유로 특정집단을 대량학살하는 행위)폐지법안 대한민국 정부연서 제출의 건을 가결하고 9월 29일 부역행위특별처벌법을 의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28일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인 특별조치령을 내놓고 6월25일 전쟁 발발 당일로 소급적용해 '부역죄'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국군이 경남 통영 등지를 되찾은 1950년 8월 20일경부터 법적 절차 없는 '부역자 처형'이 이뤄졌다.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엔 더 심해졌다. 국회는 가혹한 엄벌주의로 시행된 특별조치령의 폐단을 막기 위한 '부역행위 특별처리법'을 내놓았다. 부역행위 처리에 신중을 기하고 처벌에 대한 감면이나 면제 사례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놨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재의를 요구했고 11월 13일 국회의 재가결이 이뤄진 이후인 12월 1일에야 공포했다.

이행의지는 없었다. 오히려 1950년 10월 4일 법률적 근거없이 계엄사령관 지휘하에 설치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1951년 해체될때까지 부역자 처리임무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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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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