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지명 국무총리 '낙마'

2019-09-26 11:05:30 게재

이윤영 의원, 3차례 부결

인사청문 도입 직후에도 장상·장대환 동의 못받아

진보정부때 인사청문 정착

정부수립 첫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명한 이윤영 국무총리후보자(사진)가 본회의 승인투표에서 부결됐다. 헌법에 의해 처음으로 지명된 후보자가 낙마한 셈이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로 국회가 구성됐고 7월17일 제헌국회가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제정일은 7월12일이었다. 제헌헌법 69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7월 20일 국회는 제1대 대통령·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 무소속 김구·안재홍을 후보로 투표한 결과 재적 198명 중 197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승만이 92.3%(180표)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였다.

이 대통령은 7월 27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국무총리 지명연설을 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물망에 오른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에 대한 불가입장을 설명하면서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고 했다. "제일 급한 것이 남북통일 문제"라며 "조만식 선생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일환 의원은 "대통령이 이윤영 의원이 북조선을 대표한 것처럼 말했다"며 "대통령의 말은 그릇된 말"이라고 했다. 표결결과는 재석 194표, 배표 193표, 가 59표, 부 132표, 기권 2표였다. 본회의를 진행한 김동원 부의장은 "국무총리 승인의 건은 부결된 것을 선포한다"고 했다. 오후 12시30분이었다.

5일 후인 8월 2일 이 대통령은 이범석 의원을 국무총리에 지명, 승인을 받았다. 이윤영 의원은 이범석 총리가 사임한 이후 1950년 4월 3일에 또다시 이윤영 의원을 지명했지만 6일 본회의 인준에서 부결됐다. 1952년 10월 17일 또다시 국무총리에 지명됐고 재석 166명 중 128명이 반대해 승인을 받는데 실패했다.

인사청문회법이 도입된 2000년이후 첫 인사청문회는 이한동 국무총리였다. 6월 26일부터 이틀간 진행한 이후 임명동의를 받았다. 하지만 2002년 장상 국무총리후보자와 장대환 국무총리후보자는 7월 31일과 8월 28일에 각각 부결돼 연거푸 '낙마'했다.

인사청문회 기틀은 진보정권 기간에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중인 1998년 2월~2008년2월까지 사실상 현재의 인사청문시스템이 확정됐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은 '인사청문회 도입'의 공이 있다면 노 대통령은 '정착'과 '강화'에 주력했다.

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월 24일에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은 대통령이 지명한 국무총리와 함께 국가정보원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검찰총장 등 4대 권력기관장을 모두 인사청문회에 세우도록 했다. 대통령이 용인하거나 적극 추진하지 않으면 어려운 법개정사안이라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5년 7월 28일엔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임명하거나 지명한 헌법재판관과 중앙선관위원 외에도 17명의 국무위원 후보자들도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다. 대선이 끝나 임기를 두달 앞둔 2007년 12월 14일엔 대통령당선인이 지명하는 국무위원 후보자도 인사청문회를 통해 검증받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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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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