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러시아 석유 금수조치 가능할까

2022-03-08 10:55:20 게재

이코노미스트지 "미, 다양한 시나리오 모색"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은 폭탄발언을 던졌다. 그는 "우리는 유럽 동맹국, 협력국들과 러시아 석유 금수조치 가능성과 관련해 합의된 방식을 찾기 위해 논의중"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원유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블링컨 발언 직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9% 이상 급등했다. 브렌트유 역시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했다. 지난해 12월 1일 대비 2배 올랐다. 그러다 이튿날 배럴당 123달러로 내려갔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된다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200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번주 세계 최대 에너지 포럼인 '세라위크'(CERAWeek)가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다. 금융정보 기업 S&P글로벌이 주관하는 이 행사에는 사우디 아람코와 엑슨 대표,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과 미국 에너지부 장관 등 에너지업계 수장 수천명이 참석한다. 행사의 본래 취지는 장기 이슈인 기후변화와 에너지전환 논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지정학 이슈가 세라위크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7일 블링컨 장관의 발언으로 석유시장이 화들짝 놀란 데 대해 3가지 측면을 주목했다. 첫째 원유 공급이 수요를 메우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졌다는 점이다. 원유시장의 수요공급 균형은 지난해부터 깨졌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급감했던 원유 수요는 지난해 강력 반등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석유 수요가 올해말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에너지 전문매체인 '에너지인텔리전스'의 리서치담당 아비 라젠드란은 "기업들은 원유 재고를 쌓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안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석유 공급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코로나로 인한 투자부족과 각종 차질 때문이다. OPEC은 생산 할당량을 늘릴 능력이 안된다. 라젠드란은 "우크라이나 사태 전에도 원유 시장은 하루 약 100만배럴 공급부족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향해 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블링컨의 발언으로 유가가 출렁인 두 번째 이유는 러시아가 1일 평균 원유 450만배럴과 정유제품 250만배럴을 수출하는 전세계 2위 에너지 대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제재 또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경제적 반격 일환으로 러시아 원유 수출이 중단된다면, 전세계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서구는 이런 리스크를 염두에 두고 잠재적 원유 재고에 눈을 돌리고 있다. IEA는 이달 1일 "회원국들이 약 6000만배럴의 전략비축유를 방출하는 데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IEA의 전략비축유 결정은 1990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강타, 2011년 리비아 내전 때 이뤄진 바 있다.

이에 대해 골드만삭스 원자재 수석전략가인 데미언 쿠발린은 "일회성에 그칠 전략비축유 방출로는 러시아 원유 수출 상실분을 메울 수 없다"며 "러시아 해상 원유수출이 중단된다면 이를 상쇄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 어떤 산유국이나 카르텔도 러시아 원유 수출 상실분을 충분하고 신속하게 대체하기 어렵다. 투자은행 '에버코어'의 분석가 제임스 웨스트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수개월 내 증산할 수 있는 양이 최대 100만배럴이다. OPEC의 총 여분 증산량은 200만배럴을 넘지 않는다"며 "캐나다와 브라질 가이아나의 석유생산량이 늘어나고 있지만 모두 합쳐도 올해 추가 증산량은 100만배럴을 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가지 대안은 자국의 셰일석유업계다. 조 바이든 행정부 내 여러 고위급 관료들이 이번주 열리는 세라위크에 참석한다. 셰일석유 기업들에게 증산을 채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재 셰일석유 기업들의 우선과제는 증산이 아닌, 수익성이다. 이익실현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와 셰일석유 업계 관계는 매끄럽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이후 기후변화 대처를 내세우며 석유업계와 각을 세워왔다.

이미 미국 셰일석유 생산량은 올해 100만배럴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에 더해 추가로 증산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단 공급망 스트레스가 크다. 셰일업계 한 관계자는 셰일석유 처리과정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모래 가격이 최근 3배 올랐다고 호소한다.

또 다른 선택지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다. 6개월 내 50만배럴, 1년 내 100만배럴의 원유가 국제시장에 풀릴 수 있다. 지난주 이란과 미국, 기타 관련국 사이에 제재 완화 거래가 타결될 듯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제재에서 러시아-이란 교역은 제외할 것을 보증하라'고 갑작스레 요구하면서 상황은 어그러졌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베네수엘라와도 협상중이다. 미국의 제재로 석유수출이 제한되는 또 다른 나라다. 하지만 골드만삭스의 쿠발린은 "베네수엘라 제재가 풀려도 1년 내 추가되는 물량은 50만배럴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업계가 흔들린 세번째 이유는 '자기검열' 가능성이다. 미국이 대 러시아 제재를 표명하기 전에도 러시아 원유수출은 감소세였다. 미국은 글로벌 경제 충격을 우려해 러시아 에너지 부문에 대한 제재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IEA 사무총장 파티 비롤은 "전세계 많은 나라들은 러시아 석유를 거래하는 것이 제재에 영향을 받느냐 아니냐에 대해 혼란스러워 한다"며 "그 결과 많은 거래상대방들이 러시아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피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석유 수출은 급감했다. 에너지 매체 '아르고스'의 데이비드 파이페는 "러시아 석유 약 200만배럴이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원유시장에서 퇴출됐다"고 말했다. 서구의 오일메이저들은 '러시아산 원유와 정제상품의 거래를 줄이라'는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심지어 미국 제재를 우회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중국과 인도 기업들도 러시아가 보유하거나 운영하는 기업들과의 거래, 러시아 국적의 상선 또는 항구 이용 등을 꺼리고 있다.

영국·네덜란드 에너지기업 '셸'은 러시아 원유를 할인된 가격에 거래하면서 2000만달러의 이익을 보게 됐다는 뉴스로 거센 역풍에 시달렸다. 셸은 결국 러시아 석유거래에서 얻은 이익을 우크라이나 원조자금으로 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러시아 석유 금수조치는 미국의 딜레마"라며 "직접 참전을 피하면서 최대 피해를 줄 수 있는 부문이 러시아 석유다. 하지만 러시아 수출량이 워낙 많아 한꺼번에 봉쇄하기 어렵다. 전세계 경제를 강타할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5일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에 따른 경제제재 결과가 이미 매우 심각하다"며 "상황이 악화된다면 세계경제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블링컨 장관은 6일 러시아 석유 금수조치 논의 발언에 이어 "전세계 시장에 적절한 석유 공급이 있다면, 미국은 동맹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 러시아 원유 수출을 제재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유럽의 동맹들이 원유 금수조치에 참여하길 꺼리는 건 당연하다. 미국과 달리 유럽은 러시아 에너지의 최대 고객이다. S&P글로벌에 따르면 유럽은 러시아로부터 270만배럴의 원유와 100만배럴의 연료유, 정제상품 등을 수입한다.

'충격과 공포'의 에너지 금수조치는 미국과 유럽을 경기침체로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 물론 미국이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란 제재 때처럼 조금씩 점진적으로 러시아의 원유수출을 제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지는 "점진적인 금수조치 역시 글로벌 경제에 석유파동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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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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