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신냉전'이라는 레토릭과 실체

2023-10-27 11:30:34 게재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 국제정치학

철지난 20세기 얘기지만 '냉전(Cold War)'이라는 표현을 누가 제일 먼저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주장이 분분하다. 요즘처럼 "검색하면 다 나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냉전 용어에 대한 저작권을 누가 가졌는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국내외 많은 연구자와 정책 관여자들은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의 저서 '냉전'을 계기로 미소 및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진영 대결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표현이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필자는 리프먼을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언론인 사상가 저술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리프먼은 1962년 두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그 상은 리프먼이 소련을 방문해 당시 공산권 지도자였던 흐루쇼프와 가졌던 인터뷰가 배경이 되었다. 리프먼은 뉴욕타임스에 가끔씩 "Mr. K"로 시작하는 칼럼을 실었는데, 사람들은 이 칼럼이 흐루쇼프(Khrushchev)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임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리프먼의 칼럼을 읽고서 서방과의 평화공존 정책으로 선회했다는 일화는 올드세대 서방 지식인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냉전은 탁월한 언어 유희였다. 전쟁이지만 미소 간 직접 충돌인 '뜨거운 전쟁(hot war)'은 없고 군비경쟁과 정보전쟁, 그리고 핵개발만 존재하는 차가운 전쟁만 존재한다는 주장이었으니 20세기 중후반을 통틀어 가장 현명한 직관이 아닐 수 없다.

국제안보 환경에 연계된 북중러 연계

신냉전이라는 경고음이 요란하다. 지금 들려오는 경고음의 시작은 대체로 두 갈래다. 하나는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안보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러시아는 중국에 더욱 밀착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상대로 매우 포괄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는 상황인데, 혹시 북한이 국제안보 상황을 오판해 핵실험을 포함한 여하한 안보불안을 조성하게 된다면 유엔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스스로에게 가해지고 있는 제재의 해결 없이는 안보리에 올라오는 어떤 어젠다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에서다. 이 경우 한반도 안보는 악화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신냉전을 우려한 바 있다 .

또 하나의 갈래는 최근의 일인데 앞서 첫번째 우려의 연장선에서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 70년을 계기로 한미동맹 강화는 물론 한미일 협력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불가피하게도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과 러시아를 더욱 의지하게 만들 것이고, 저널리스틱한 표현이지만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등장할 것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물론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미일 협력을 가시화하려고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이미 북한의 대중국 및 대러시아 구애전략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한미일 협력처럼 가치에 기반하거나 혹은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에 기반한 연대가 아니기에 북중러 협력은 국제안보 환경에 깊숙이 연동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연대로 이해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9월 12일 김정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및 북러 정상회담, 10월 18일 푸틴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및 중러 정상회담, 10월 18일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평양 도착, 조만간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 예측. 이러한 일들은 북중러 사이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외교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돌이켜 보면 북한이 더 큰 위기 고조와 이익 확보를 위해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를 바삐 움직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김일성 집권 시기, 1956년 8월 그 유명한 '8월 종파사건'이 있었다. 김일성은 그 사건을 계기로 소위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 및 서방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전개하자 개인숭배 비판 가능성을 우려한 김일성이 권력집중의 극대화를 위해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이 중국에 기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는 그렇지만도 않았다고 분명히 얘기한다. 그후 수년이 지난 1961년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상당한 규모의 경제원조를 받아 낸다. 외교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북한의 '시소(see-saw) 외교'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북한, 국제안보 위기에 늘 생존 모색해와

지금 김정은 위원장의 대중 및 대러 밀착외교는 할아버지의 경험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것일 것이다. 물론 김정은이 세계화 30년을 통한 매우 복잡한 방식의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지난 30년의 역사에서 북한은 국제안보 상황의 위기를 북한 생존의 기회로 포착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이 고수하던 핵무기 개발의 전략적 모호성을 과감히 폐기하기로 결정한 2012년은 미중갈등이 구조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원년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국제안보 혼돈기가 북한에게 어떤 형태로든 생존의 공간을 확장시켜 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전략 공간 확보를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다만 코로나와 경제건설의 어려움으로 인해 의도한 전략을 전개하지 못한 점이 있을 수 있다. 중국 관광객의 북한 방문 급증,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가, 유엔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노동자의 러시아 수출 모색 등은 북한이 현 시점에서 생각해 낸 생존전략들이다. 물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모든 전략의 기저에는 핵무기가 깔려있다.

지난주에는 우리 국방부 주최의 중요한 국제행사인 2023년 서울안보대화(Seoul Defence Dialogue)가 열렸다. SDD는 2012년 첫 대회 이후 지금까지 서울에 세계 주요 국가의 안보 전문가들을 초청해 동아시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다양한 공감대를 찾기 위한 자리다. 필자는 18일 '인도-태평양 전략과 해양안보'라는 주제의 패널에서 사회를 보는 망외의 기쁨을 가졌다. 이 패널에는 미국 프랑스 필리핀 한국 4개국을 대표하는 전문가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현안은 무엇인지, 또 지난 70여년 동안 유지된 태평양 안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필리핀 최고 사립대학인 라샬대학교에서 온 전문가가 자국의 입장에서 남중국해의 안보불안에 대한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 있었고, 유엔헌장에 기초한 해양 안보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청중 중에서 갑자기 번쩍 손이 올라왔다.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온 여성 장교였다. 필자는 모든 발표자들의 발언을 듣고 난 다음 기회를 주겠다고 얘기했지만 그 중국 여성 장교는 막무가내였다. 그때 어느 나이 지긋한, 아마도 주한 중국대사관 무관으로 보이는 중년신사가 그 장교에게 다가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해서 중국 참가자의 발언은 맨 마지막에 있었다. "대만은 명백한 자국 영토다. 그리고 중국은 남중국해의 평화를 누구보다도 원한다"는 게 발언의 핵심이었다.

신냉전 시대 건널 외교안보 능력 개발을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분단되었던 사례 중에 아직까지 분단상황인 나라는 한국뿐이니 신냉전이 아니고 그냥 계속해서 냉전이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보수정권일수록 미국을 상대로 정책적 자율성을 확보한 사례가 많았고, 윤석열정부 역시 미국과 일본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 이니셔티브를 적극적으로 던지고 있다. 우리 정부의 이런 자신감이 대북문제에서도 발현되기를 기대해본다.

신냉전은 레토릭적인 측면이 강하다. 동시에 신냉전의 실체를 정확하게 가늠하고 관련한 의미 있는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외교안보 능력을 키워야 할 때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