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릴 때는 번개처럼, 원자재값 내려도 가격인하는 하세월

2023-11-16 10:47:27 게재

경제부처, 그리드플레이션(기업탐욕물가상승) 화두로

국제 밀가격 50% 내렸는데 식품기업 순이익만 급증해

정부, 제재수단 없어 고심 … 해외선 가격상한제 거론

고물가 대책마련에 고심 중인 경제부처의 최근 화두는 '그리드플레이션'이다.

기업의 탐욕이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뜻이다. 탐욕(Greed)과 물가상승(Inflation)을 합성한 신조어다. 기업이 수익을 많이 내려면 원자재 가격이 떨어져도 판매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이때 물가가 뛴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원자재 가격이 오를 때는 이를 명분으로 가격을 재빨리 올린다. 반대로 원자재 가격이 내려갈 때는 인하시기를 늦추거나 다른 핑계로 가격을 내리지 않는다. 정부가 이를 통제하려 하면 가격은 그대로 두고 수량을 줄이는 편법(슈링크플레이션)을 쓰기도 한다. 최근에는 밀과 옥수수 등 주요 식품의 국제 원자재 가격이 최대 50%나 떨어졌는데 관련 상품 가격은 그대로여서 소비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런 현상 덕분에 식품업체들의 순익이 늘면서 정부가 대응책 마련을 고민하고 있다.
물가점검하는 추경호 경제부총리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 방문해 주요 품목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국재 원자재 가격은 하락 거듭 = 실제 국제 원자재 가격이 하락을 거듭하고 있지만 최근 식품 기업들의 실적은 호조세다.

16일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선물시장 등에 따르면 밀의 부셸(곡물 중량단위·1부셸=27.2㎏)당 가격은 평균 5.69달러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가격이 치솟았던 작년 5월 평균 가격(11.46달러)에 비해 50.3% 하락했다. 반토막이 난 셈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초까지 식품업계는 이를 근거로 일제히 제품가격을 올린 바 있다.

밀은 빵·과자·라면 등 식품의 주원료로 쓰인다. 또 다른 주원료인 대두의 경우 작년 3월 16.73달러까지 올랐다가 이달 13.40달러로 19.9% 하락했다. 팜유(-41.8%), 옥수수(-39.4%), 대두유(-38.3%) 등의 가격도 정점 대비 내림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원료는 작년 5월에 정점을 보인 바 있다.

문제는 업체들이 원자재 가격 상승 때 올린 가격을 지금은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더 높아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10월 가공식품 물가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7.6% 상승했다. 작년 연간 상승률(7.8%)보다 0.2%p 낮아지는 데 그쳤다.

올해 같은 기간 외식 물가의 경우 6.4% 상승했다. 작년 연간 상승률(7.7%)보다 1%p 넘게 낮아지긴 했으나, 작년을 제외하면 1994년(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식품기업 순익만 늘려 = 이에 따라 주요 식품 업체들의 영업이익만 쌓이는 형국이다.

올해 상반기 농심의 영업이익은 1175억원으로 작년 같은 시기보다 204.5% 증가했다. 빙그레(160.3%)도 세 자릿수 이상의 영업이익 증가율을 기록했다. 해태제과(75.5%)를 비롯해 풀무원(33.2%), 동원F&B(29.7%), 오뚜기(21.7%), 삼양사(20.3%), SPC삼립(16.2%) 등 주요 기업들도 영업이익 증가율이 두 자릿수 이상으로 호조를 보였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최근 성명을 내고 "(식품 기업들이) 원재료가 하락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고통 속 기업들 자신만의 이익만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의 전형적 결과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식품 업계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통상 영업이익률이 10%가 넘어가는 다른 제조업계에 비해 낮은 수치라는 것이다. 밀 등을 제외한 다른 원재료와 인건비 가격이 올라가고 있어 식품 가격을 쉽게 내릴 수 없다고도 설명한다.

◆마땅한 통제수단 없어 고심 = 정부는 식품기업들의 이같은 행태에 마땅한 정책대안이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식품업계와 소비자단체에 하소연하는 방법 외에는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기존 법령의 용량표기 등의 규정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엄격히 제재하고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규제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4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을 찾아 식품업체들의 눈속임 가격 인상 행위를 비판하기도 했다. 추 부총리는 "소비자가 부지불식간 양이 줄었는데 줄었는지를 모르고 소비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정직한 경영이 아니다"라며 "가격 표시, 함량 표시, 중량 표시가 정확히 돼야 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현행 법규에 따라서 엄정하게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에 부당 이익이 생기면 결국 세금을 통해 국고로 돌아오도록 하는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며 "편법 회계처리에 대해선 세무당국이 엄밀히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세무조사까지 거론하며 기업의 가격 인상 자제를 압박한 셈이다.

정부가 소비자단체 대표와 만나 기업의 가격 상승에 대해 목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하는 이례적 모습도 연출됐다.

홍두선 기재부 차관보는 지난 15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찾아 소비자단체 대표 등과 간담회를 갖고 "다양한 품목에 대한 물가감시 활동을 하면서 꼼수·편법이나 과도한 가격 인상, 원가하락 요인 미반영 등 불합리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달라"고 했다.

◆해외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나 = 그리드플레이션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EU를 중심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선 정부가 1970년대 도입한 바 있던 가격상한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영국은 지난해부터 식품·유통회사들의 가격 인상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식품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이는 다시 기준금리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악순환이 생겼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식품의 물가 상승률은 올해 3월 19.2%, 4월 19.1%, 5월 17.2%를 기록했다. 1977년 8월 21.9%를 기록한 이후 45년 만에 최고치다. 영국에서는 총리와 장관들이 직접 나섰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지난 1월 연설에서 "올해 안에 인플레이션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목표치를 제시했다. 의회에서는 식품 가격상한제 도입이 거론되자 결국 식품회사들이 백기를 들었다. 지난 12일 유기농 식료품을 파는 슈퍼마켓 체인 웨이트로즈는 2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13일엔 영국 3위 슈퍼마켓 체인 ASDA가 8월까지 5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1위 유통업체인 테스코는 아일랜드에서 7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평균 10%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같은 업계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 외신들의 평가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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