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핵심기반 마비에도 "재난 아니다"

2023-11-21 11:08:27 게재

행안부 '단순 사고' 최종 판단

재난부서 의견 다르지만 침묵

행정전산망이 56시간 동안 먹통상태가 됐는데도 정부는 '재난이 아니라 단순 사고였다'고 주장한다. 재난분야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에 담긴 41개 유형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정작 재난관련 부서들은 이 같은 판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행정안전부 내부에서조차 의견조율이 되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21일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행정안전부는 행정전산망 마비사태 발생 11시간 후인 오후 7시 30분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대책본부'를 구성했다. 이어 1시간 30분 뒤인 오후 9시쯤 첫 회의를 열었다. 행안부가 장애 발생 11시간 후에야 이번 사태를 재난에 준한 비상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행안부 내부에서조차 관련 부서들 사이에 '재난이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행정전산망 장애가 '재난분야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에 담긴 41개 유형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재난이 아니다'라고 최종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난안전관리 부서들은 이번 사태를 재난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았다. 다만 이번 사태가 행안부 소관 부서 업무인 탓에 해당 부서 판단에 대해 이견을 내지 않았다. 보통 다른 부처에서 유사한 형태의 사고가 발생했다면 즉시 개입해 상황파악부터 했겠지만, 행안부 내부 관할 사고라서 입을 닫은 셈이다.

다수의 재난안전 분야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를 재난안전기본법상 사회재난으로 규정한 '국가핵심기반의 마비'에 해당된다고 봤다. 또한 전국에서 상황이 발생했고, 부동산거래나 금융거래를 제때 하지 못해 재산상 피해를 입은 국민들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측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 재난안전 부서 관계자는 "사회재난이라는 게 원래 처음 경험하는 재난일 가능성이 높다"며 "다른 부처 관할 사고였다면 개입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안부가 뒤늦게 고기동 차관을 본부장으로 한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 대책본부'를 구성한 것은 재난 판단 여부가 애매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재난으로 분류됐다면 중앙재난수습본부를 구성해야 하지만 재난이 아니라고 최종 판단한 탓에 이에 준하는 규모로 대책본부를 구성한 것이다.

한편 행안부는 행정전산망 정상화 이후에도 명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행안부는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L4 스위치'라는 네트워크 장비를 지목했다. 하지만 장비 자체의 문제인지, 장비를 다루는 사람의 문제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장비 문제는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인재'라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L4 스위치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매뉴얼조차 지키지 않아 사태를 키운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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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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