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가자, 민간인 안전지대 없어"

2023-12-05 10:39:48 게재

"남부 이미 과밀, 이스라엘 대피령 부당" … 국제적십자 총재 "용납 못할 일"

가자지구 북부지역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이 남부지역 공습에 이어 본격적인 지상전에 나서면서 북부를 떠나 이 지역으로 피란해 온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4일 남부 가자지구 라파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는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의 공습 현장에 서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4일(현지시간)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하마스를 뿌리 뽑을 때까지 가자 남부에서 머물 것이라고 밝혔고, 실제 남부 칸유니스 인근에선 이스라엘의 탱크와 장갑차 수십대가 목격된 상황이다. 공세 강화에 나선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게 대피하라고 고지했지만, 유엔은 "피란민들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스테판 뒤자리크 대변인을 통해 낸 성명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에 국제인도법 의무를 존중하라고 촉구하면서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민간인 대피 경고와 관련해선 "안전하게 갈 곳은 없다"고 지적했다.

구테흐스 총장은 "유엔은 이스라엘군이 이미 재앙 수준인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상황을 악화시키는 추가 행동을 피하고 민간인을 추가적인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것을 계속 호소하고 있다"면서 "의료진과 언론인, 유엔 요원을 포함한 민간인과 민간 인프라는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남부 공습을 예고하며 민간인 대피를 고지한 것과 관련, "대피 명령을 받은 민간인들이 안전하게 갈 곳은 없으며 목숨을 부지하게 할 것도 거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1일 하마스의 휴전 조건 위반을 문제 삼아 가자지구 공세를 재개하면서 주민들에게 민간인 대피로를 새로 제시했다. 그간의 교전 속에 사실상 폐허가 된 가자 북부뿐 아니라 다수의 피란민이 옮겨와 있는 남부에도 공습을 예고하며 대피 지역을 고지했다.

하지만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이날 이스라엘군이 제시한 새 대피처가 수용능력이 부족한 곳이란 점에서 부당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OCHA는 가자 남부 주요 도시이자 대규모 난민 캠프가 조성된 칸유니스의 상황을 언급했다.

칸유니스는 지난달 7일 전쟁 발발 이전에는 주민 11만7000명이 거주했지만 전쟁 이후엔 피란민 5만여명이 새로 유입돼 21개 보호시설에 모여 있다.

이스라엘군이 지난 3일 대피령을 내린 지역은 칸유니스 내 20%에 해당한다. 이스라엘군이 칸유니스 동쪽의 알푸카리 마을과 이집트와 접경 지역인 라파의 아쉬 샤보라, 텔 아스 술탄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군이 대피 지역으로 제시한 곳은 이미 수용능력 이상의 피란민이 있는 과밀 지역이라고 OCHA는 지적했다.

전쟁이 터진 후 가자지구 인구의 80%가량인 180만여명이 피란민이 됐고, 이들 가운데 110만명이 유엔 보호시설 156곳에서 살고 있다. 19만여명은 공립학교와 병원등지에 있고, 나머지는 친척의 집에 함께 머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대규모 피란민이 발생한 상황에서 가자 남부는 과밀화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OCHA는 전했다.

OCHA는 "가자 남부 보호시설로 피란민이 몰리면서 위생 환경이 열악해졌고 급성호흡기 감염과 피부병, 기타 전염성 질병이 생기는 사례가 많이 증가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도 내려진 이스라엘군의 대피령은 사실상 민간인 보호 의무를 규정한 국제인도법에 배치된다는 점을 OCHA는 짚었다.

OCHA는 "국제인도법에 따라 분쟁 당사자는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할 모든 예방조치를 해야 하며 여기에는 민간인이 대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안전한 장소, 위생 여건 등을 제공하는 일이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날 가자지구를 찾은 미르야나 스폴야릭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총재도 이스라엘의 공습이 가자 남부로 확대되면서 이미 집을 떠난 주민들이 피난처를 다시 버리고 어딘가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을 개탄했다.

그는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 민간인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없다는 점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가자지구 곳곳이 군사적으로 포위된 현재 상황에선 적절한 인도주의적 대응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스폴야릭 총재는 향후 수주간 가자지구에 머물며 전란 속에 부상한 주민을 치료하는 병원과 구호품 전달 현장 등지를 찾고 이스라엘도 방문할 예정이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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