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녹음 통화내용 '돈 선거' 증거 인정

2024-01-08 11:09:52 게재

대법 "공익 크면 증거능력 인정 필요"

녹음 경위·내용 따라 인정 안 될 수도

개인간 통화 당사자가 위법하게 녹음한 내용도 사생활 침해가 중대하지 않다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공공단체등위탁선거에관한법률(위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수산업협동조합 조합원 A씨에게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8일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이 전화통화 녹음파일 중 A씨와 그의 배우자 사이의 전화통화 부분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며 "원심의 판단에 위법수집증거, 2차적 증거의 증거능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는 등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앞서 전국동시조합장선거 선거운동에 나섰던 A씨와 B씨, 또 조합장선거 후보로 나선 C씨는 함께 공모해 금품을 제공하고,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등 위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A씨로부터 압수한 휴대전화에서 A씨가 B·C씨와 통화한 녹음파일, A씨가 본인의 배우자와 통화한 녹음파일 등을 다수 발견해 증거로 제출했다.

다만 해당 녹음파일은 A씨의 배우자가 불륜 등을 의심해 A씨 휴대전화에서 몰래 자동녹음기능을 활성화했고, 이로 인해 녹음된 파일이었다.

1심에서는 선거운동원인 A씨와 B씨에게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선거 후보자였던 C씨에게는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피고인들은 통신비밀보호법 제4조에 따라 '불법감청에 의한 전기통신내용은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사건 녹음파일은 피고인들의 이 사건 범행의 증명을 염두에 두고 생성된 것이 아니고, 수사기관 역시 해당 녹음파일의 생성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은 채 적법하게 압수한 휴대전화를 분석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며 "녹음파일을 증거로 사용한다고 해서 통화 당사자들에 대한 사생활의 본질적인 침해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심에서도 A씨와 B씨의 항소는 기각됐다. C씨는 일부 무죄가 선고됐지만, 형량은 징역 1년4개월로 늘었다.

검사와 피고인들 양쪽이 불복해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렸다.

상고심 쟁점은 휴대전화에 녹음된 A씨 부부의 통화 내용을 혐의 입증의 증거로 쓸 수 있는지였다.

대법원은 이 사건의 경우 증거 사용이 가능하다고 보고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아내가 A씨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직접 통화한 내용이라 침해 정도가 크지 않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선거 범죄의 특성상 녹음 파일을 증거로 사용할 필요성도 크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대법원은 "증거 수집 절차가 개인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벗어난 것이라면 단지 형사소추에 필요한 증거라는 사정만을 들어 곧바로 형사소송에서 진실발견이라는 공익이 개인의 인격적 이익 등 보호이익보다 우월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한 사람이 몰래 녹음해 상대방의 형사사건에 증거로 제출하는 일반적인 사례에서도 '녹음 경위와 내용 등에 비춰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면'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도 있다는 취지다.

다만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밝히지는 않아 어떤 상황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을 수 있는지는 향후 법원의 판결이 누적돼야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화 통화 일방당사자의 통화 녹음파일의 증거능력이 문제가 된 상황에서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에서는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이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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