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 사상최대급 자료누락 대기업 회장에 경고만

2024-02-29 13:00:01 게재

윤석열정부 출범 뒤 19건 조사해 1건만 검찰고발, 고발율 5.3%

문재인정부 때는 15건 중 8건 고발, 7건은 경고, 고발율 53.3%

기울어진 경제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 할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 편향으로 기울고 있다. 독점폐해 견제와 시장경제 파수꾼을 자처하는 공정위로선 치욕이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기업자율’을 강조한 윤석열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여야합의 수준까지 근접했던 온라인플랫폼법을 백지화했다. 수십만 플랫폼 입점 영세업체의 생사는 공룡플랫폼의 ‘자율’에 맡겨지게 됐다.

지난해에는 총수의 간접·묵시적 관여까지 처벌한 대법원 판례을 반영해 고발지침을 고치려다 재계의 역습을 받고 없던 일로 했다.

글로벌 플랫폼기업의 횡포를 예방하기 위해 추진하던 ‘플랫폼법’은 재계와 여당이 고개를 젓자 총선 뒤로 연기했다.

최근에는 3건의 대기업 지정자료 허위제출 사건을 공정위가 모두 경고처분으로 끝냈다.

29일 내일신문이 공정위가 공개한 7년치 심사의결서를 집계한 결과, 공정위는 정부 출범 뒤 19건의 ‘지정자료 허위제출 사건’을 처리하면서 단 1건만 검찰에 고발했다. 18건은 경고처분에 그쳤다. 검찰고발 비율을 따지면 5.3%다.

반면 문재인정부 때 처리한 사건을 집계해보니 15건 중 과반인 8건을 검찰에 고발했다. 고발비율은 53.3%다. 7건은 경고처분했다.

경총 회장 만난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한기정 공정위원장(왼쪽)이 지난 1월18일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에서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과 면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 한국경영자총협회 제공

◆공정위 사무처는 ‘고발의견’ = 대기업집단 지정자료를 제출하면서 계열사를 누락한 J홀딩스 H회장이 공정위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최근 H회장의 지정자료 허위제출 사건에 경고처분을 의결했다. 지정자료는 매년 공정위가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을 위해 동일인(대기업 총수)으로부터 받는 자료다. 주로 계열사 현황, 친족 현황, 임원 현황 등이 담겨 있다. 공정거래법상 총수일가 사익편취나 일감몰아주기 제재의 근거가 된다.

H회장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지정자료를 제출하면서 72개 계열사 지정자료 제출을 누락했다. 하지만 공정위 전원회의는 H회장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경고처분만 했다. 72건의 지정자료 제출누락은 건수로는 사상최대급 수준이다. 다만 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인정건수가 일부 줄었다는 후문이다.

공정위는 아울러 정몽원 한라 그룹 회장과 조현준 효성 회장의 지정자료 허위 제출 행위에 대해서도 경고 처분을 의결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검찰고발은 동일인의 고의성, 허위제출의 중대성을 놓고 판단하는데 고의성이나 중대성이 떨어진다고 (공정)위원들이 판단한 것 같다”면서 “자세한 내용은 1~2주 뒤 공개되는 심사의결서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3건 모두 경고, 이례적 = 공정위 조직구조는 특이하다. 공정거래법 관련 사건을 전속 처리하는 경제검찰이면서 동시에 1심 재판부 역할도 한다. 흔히 말하는 ‘공정위’는 ‘공정위 사무처’를 말한다.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하는 경찰과 검찰 역할을 한다.

재판부 역할은 9명의 공정위 위원들이 담당한다.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당연직이고, 통상 공정위 사무처 출신 3명의 상임위원과 민간에서 선임된 4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번에도 지정자료 허위제출 사건을 적발·조사한 것은 공정위 사무처이고, 최종 경고처분을 결정한 것은 공정위원들이다.

내일신문 취재에 따르면 공정위 사무처는 H회장 등 3건의 사건 모두 ‘고발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 격)를 냈다. 공정위원들이 이를 토대로 사건을 심의했지만, 사무처의 고발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고처분으로 제재수위를 낮춘 것이다.

3건 모두 사무처가 ‘고발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낸 것도 이례적이고, 모두 경고로 낮춘 결정을 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실제 H회장의 경우 허위제출 건수가 사상최대급이어서 중대성이 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전직 공정위 관계자는 “지정자료 사건은 통상 실무착오나 친족간 불화 등에 따른 경우도 많아 심사보고서에 고발의견을 담는 사례가 훨씬 적다”면서 “이를 공정위원들이 경고조치로 낮춘 것은 새정부 출범 이후 바뀐 ‘친기업’ 정책기조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했다. 익명을 요구한 공정위 관계자는 “개인적으로는 유감스럽다”고 내부기류를 전했다.

◆"대기업에도 '법과 원칙' 똑같이 적용해야" = 공정위원들의 이같은 기조 변화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공정위는 정부 출범 뒤 현재까지 19건의 ‘지정자료 허위제출 사건’을 처리했다. 이중 박찬구 금호석유화학회장 사건 단 1건만 검찰에 고발했다. 나머지 18건은 경고처분에 그쳤다. 검찰고발 비율을 따지면 5.3%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의 경우 최근 2년 사이에 지정자료 허위제출만 3차례 범했지만 모두 경고에 그쳤다. 신동빈 롯데 회장,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 최태원 SK 회장, 서성진 셀트리온 회장 등도 경고처분을 받았다.

반면 문재인정부 때 다룬 사건을 집계해보니 고발비율이 53.3%였다. 고발비율로 따지면 거의 10배 차이가 난다. 당시 공정위는 15건 중 과반인 8건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중근 부영 회장을 비롯해 조양호(한진) 이건희(삼성) 이해진(네이버) 이호진(태광) 정몽진(KCC) 박문덕(하이트진로) 김상열(호반건설) 등이 검찰 고발 명단에 올랐다. 물론 대기업 총수에 대한 검찰 고발 건수가 줄었다는 사실이 ‘재벌 봐주기’로 직결되진 않는다. 사건마다 사연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53.3%→5.3%’라는 통계수치의 급격한 변화는 ‘정권에 따른 판단기준의 변화’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대규 법무법인 티와이로이어스 변호사는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공정위 기조가 친재벌 편향으로 기울었다는 지적이 많다”면서 “대기업에도 ‘법과 원칙’을 똑같이 적용해 기울어진 경제운동장을 바로잡는 공정위 본연의 자세를 회복할 것”을 주문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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