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놓친 독일 차업계 실존적 위기

2024-03-29 13:00:05 게재

전기차 격변기에 휘둘려 … 슈피겔 “후발주자 인정하고 선두 혁신 가로채야”

전기차 구매자들의 불만이 내연기관차를 되살리고 있다. 독일 연방정부의 전기차 전환 프로젝트는 실패할 위기에 처했다. 독일 국민은 전기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조업체들도 가격이나 주행거리 측면에서 매력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한다. 때문에 전기차는 여전히 월급이 넉넉한 사람들의 영역이다. 정치적 조건도 불리하다.

28일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서 2만5000유로(약 3600만원) 미만의 전기차를 시판하는 제조업체는 없다. 대부분 3만유로를 훨씬 넘는다. 수년 동안 소형 전기차 베스트셀러였던 폭스바겐 ‘e업’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단종됐다. 폭스바겐은 2026년까지 저렴한 전기차를 다시 출시할 계획이 없다. 한편 메르세데스가 중국 지리와 합작한 전기차 ‘E스마트’는 기능이 추가되면서 계속 가격이 오르고 있다. 대부분 전기차는 동급 내연기관차보다 수천유로 더 비싸다.

여기에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전기료의 급격한 변동성 등까지 더해졌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는 올해 전기차 판매량이 14%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정치권도 현재의 혼란에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독일 연방정부는 지난해 12월 최대 4500유로에 이르는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중단했다. 또 개인용 전기차 충전소 ‘월박스’를 장려하기 위한 2억유로 보조금 프로그램도 취소했다. 예산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소비자를 불안케 하고 자동차 제조사들을 당황케 만든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이 때문에 2030년까지 독일에 1500만대 전기차를 배치하겠다는 정부의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현재는 목표치의 1/10에 불과하다.

고객들, 가격과 주행거리에 불만

하지만 전세계에 전기차의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슈피겔은 “문제는 독일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그같은 시대전환의 일부가 돼 변화를 주도할 것인지, 아니면 변화에 휘둘릴 것인지 여부다. 독일은 글로벌 자동차산업에서 주도권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제 전기차 전환 기술과 속도는 다른 나라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인 중국에서는 판매되는 신차의 약 1/4이 순수 전기차다. 중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력 있는 전기차가 필요하다. 경쟁은 폭스바겐 BMW 메르세데스가 아니라 미국 테슬라와 중국 BYD가 주도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국시장에 국한되지 않고 독일과 유럽에서도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기존방식에 집착하는 것은 경제적 자살행위다. 하지만 수익성이 좋은 내연기관차의 종말을 최대한 늦추고 싶은 유혹도 크다. 최근까지만 해도 순수 전기차를 지향했던 메르세데스-벤츠는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를 단계적으로 퇴출하겠다는 유럽연합(EU)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EU도 전기차 전환이 최우선순위는 아닌 듯한 모습이다. 내연기관차의 단계적 폐지를 강력히 지지했던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2026년 이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럽의회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을 대표하는 유럽인민당(EPP)은 내연기관차 금지정책을 되돌리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은 오는 6월 9일 유럽의회 선거 이후 전기차 전환을 포함한 모든 기후보호정책의 폐지를 밀어붙일 방침이다.

그렇다면 독일 자동차 구매자들은 왜 주저하고 있을까. 신차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카와우(Carwow)’가 이용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5%가 다음 차로 전기차를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답해 지난해 10월(39%)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하지만 예비 구매자들은 현재 전기차의 주행거리에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가 짧은 주행거리와 높은 가격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카와우 설립자 필립 사일러 폰 아멘데는 “고객들은 딜레마에 직면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전기차로 전환하고 싶지만 기술이 발전하고 자동차 가격이 더 저렴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독일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우려하는 한가지 지점이 있다. 여전히 전기차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차 독일제보다 외국브랜드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설문 응답자의 절반이 중국 브랜드를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10월 대비 거의 2배 높아진 수치다.

중국의 대대적 공세

BYD는 중국 최대이자,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전기차 제조사다. 이 회사는 수십년 동안 중국시장을 선도해 온 폭스바겐을 2023년 제쳤다. 4분기엔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생산업체로 올라섰다.

독일과 스웨덴에서 BYD 자동차를 독점 수입판매하는 ‘헤딘’의 최고운영책임자 얀 그린데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 시장에서 BYD의 입지를 확고히 할 것”이라며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독일을 건너뛸 수 없다”고 말했다.

헤딘은 BYD를 통해 지금까지 어떤 외국 브랜드도 해내지 못했던 ‘독일 자동차시장 공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카와우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5%가 BYD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해 이 브랜드가 인지도를 빠르게 높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은 2년 내 독일에서 10만대 넘는 전기차를 판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UBS는 BYD 등 중국 제조사들이 독일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고 본다. 한 연구에 따르면 유럽 전기차시장에서 중국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3%에서 2030년 20%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BYD는 폭스바겐 BMW 메르세데스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던 독일 7개 대형 자동차판매대리점 그룹들과 협력하고 있다. BYD가 딜러들에게 가격책정 등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가가 3만8000유로에 조금 못 미치는 BYD 소형 SUV인 아토3 컴포트는 3000유로 보상판매보너스, 한자릿수 퍼센트의 딜러할인을 제공한다. 폭스바겐과 달리 BYD는 이렇게 할인된 가격에도 흑자를 낼 수 있다. 게다가 아토3는 시작에 불과하다.

BYD는 중국에서 1만유로 미만의 대중모델 BYD시걸을 판매하고 있다. 독일 제조사들은 도저히 그 가격에 제공할 수 없는 제품이다. BYD시걸은 곧 독일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가격표는 중국에서보다 높아지겠지만, 여전히 서구 모든 제조사들 모델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현재 EU 집행위원회는 중국 전기차에 대한 무역장벽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달 7일부터 중국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모든 전기차는 세관에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BYD를 막기엔 충분치 않을 전망이다. BYD는 EU의 관세장벽 안에 있는 헝가리에 자체 공장을 세워 징벌적 관세를 피할 계획이다. BYD는 이곳에서 독일에 직접 전기차를 공급할 수 있다.

“독일, 포기하기엔 이르다”

슈피겔은 “전기차 경쟁에서 아직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독일이 벌써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지적했다.

최대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 역시 아직 합리적인 가격대의 대중시장 모델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전기차 선구자인 테슬라가 연간 30%, 40%, 심지어 50%의 성장을 목표로 삼던 시대는 끝났다. 머스크는 2024년 매출예측조차 못하고 있다. 테슬라는 최근 전기차 가격을 2번에 걸쳐 수천달러 인하했다. 현재 테슬라 주가는 사상최고치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또 최근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10대 기업에서 탈락했다. 이 회사는 이미 전성기를 지났을 가능성이 있다.

고객은 불확실하고 기업들은 과잉생산과 판매부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는 독일 자동차 제조업체에게는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르노의 루카 드 메오 회장은 항공업계의 에어버스와 비슷하게 유럽 자동차동맹을 제안했다. 폭스바겐과 르노, 스텔란티스가 힘을 합치면 미국과 중국에 맞서는 동시에 대중에게도 저렴한 전기차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독일은 현재의 치열한 경쟁구조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중국에는 BYD만큼 강력하지는 않은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곧 파산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폭스바겐과 BMW를 비롯한 기타 독일 기업들이 기술과 소프트웨어 및 특허를 포함한 파산자산을 매입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독일은 여전히 내연기관차를 팔면서 현금을 축적해놓고 있다.

슈피겔은 “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역설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 오랫동안 기술변화를 안일하게 받아들인 후발주자가 앞선 주자들의 혁신을 가로채는 것”이라며 “독일도 다른 나라들을 앞설 수 있는 잠재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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