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밸류업에 ‘주기적 지정제 면제’ 추진…‘회계개혁’또 흔들

2024-04-02 13:00:02 게재

금융당국, 지배구조 우수기업 ‘감사인 지정’ 대상에서 빼주기로

“기업 자율에 맡겨서는 개선 쉽지 않아”…‘지배구조 워싱’ 우려도

금융당국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연계해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에 한해 ‘감사인 주기적 지정제’를 면제해주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주기적 지정제 면제’라는 당근을 제시하면 기업 스스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설 유인책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2015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 이후 단행된 회계개혁의 한축으로 도입된 주기적 지정제에 예외를 두면 회계개혁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기업들의 반발에 지난해에도 주기적 지정제를 완화하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금융당국은 시행 후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며 정책 효과 분석을 위해 당분간 현 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하지만 10개월 만에 다시 ‘면제’ 카드를 꺼내들면서 ‘밸류업’을 명분으로 기업들이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주는 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기적지정제는 상장회사 등이 6년간 감사인을 자유선임했다면 이후 이후 3년은 금융당국(증권선물위원회)이 외부감사인을 직접 지정하는 제도다. 외부감사인이 감사계약의 권한을 가진 기업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감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지만 기업들은 주기적 지정제 시행에 따른 부담이 크다며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기업밸류업 표창, 면제 심사시 가점 … “근본 치료 안될 것” = 2일 오전 금융위원회는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김소영 부위원장 주재로 ‘기업 밸류업 관련 회계·배당부문 간담회’를 열고 “외부감사인 선임·감독시스템을 잘 갖춘 지배구조 우수 기업에 대해 감사인 주기적 지정을 면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또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과 연계해 기업가치 제고 노력을 인정받아 ‘기업 밸류업 표창’을 받는 경우 지정 면제를 위한 지배구조 평가시 ‘가점요소’로 반영하고, 향후 감리결과 조치시 제재 감경사유에 이를 추가한다는 방침이다. 기업밸류업 표창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공시한 기업 중 목표설정의 적절성과 계획수립의 충실도, 이행 및 주주와의 소통 노력 등을 종합평가해 매년 5월 10여개사(경제부총리상, 금융위원장상, 거래소 이사장상 등)를 선정해 수여할 예정이다.

하지만 기업 지배구조의 실질적인 변화 없이 금융당국이 제시한 프로그램을 잘 이행했다고 인센티브를 주는 것은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그린워싱(친환경으로 위장)과 같은 ‘지배구조 워싱’ 우려도 낳고 있다. 밸류업 지원방안의 핵심은 코스피·코스닥 상장기업 스스로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각 기업이 ‘계획 수립과 이행 평가’ 등을 매년 자율 공시하는 내용이다.

대형 회계법인에서 근무했던 한 회계학과 교수는 “밸류업을 위한 공시확대는 좋지만, 본질은 기업이 수익을 많이 내기 위해 비즈니스가 바뀌고 지배구조가 달라져야 하는데, 자율에 맡겨서는 쉽지 않다”며 “내부는 곪아 있는데 피부연고만 바르는 것으로 근본치료가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인센티브를 준다고 해도 기업 자율에 맡긴 밸류업 지원방안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회계업계 ‘기업밸류업에 오히려 역행’ = 회계업계에서는 ‘주기적 지정제 면제’가 기업밸류업에 오히려 역행하는 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기업이 스스로 가치를 높이려면 강도 높은 회계감사를 통해 회계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회계법인의 한 대표회계사는 “특정 기업에 대해 주기적 지정을 면제해주겠다는 방안 자체가 외부감사를 징벌로 보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며 “밸류업을 하려면 감사를 제대로 받아야 하고 밸류업을 측정하는 항목에 가점 요인으로 지정 감사제를 넣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밸류업을 위한 유인책으로 ‘지정 면제’라는 당근을 제시한 것이지만, 기업들이 정확하게 감사를 받아서 감사 비용보다 더 큰 효과를 얻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정제를 하는 이유는 감사인을 독립적으로 선임할 수 없는 기업환경이라서 강제적으로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것”이라며 “반대로 감사인을 독립적으로 선임할 수 있는 기업환경 갖춘 곳이라면 지정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들 입장에서는 지배구조 우수하게 만들 유인”이라고 말했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항상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실제로 시행할 때 지배구조 우수기업을 어떻게 평가해서 선정할지 봐야 하겠지만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바꾸는 일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감사위원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우려했다.

◆‘지배구조 평가위원회’ 구성해 평가·선정 = 금융위는 지배구조 우수기업 선정과 관련해 “감사인 선임·감독시스템의 정상적인 구축·운영 여부 등을 핵심 평가기준으로 해서 외부기관·전문가 중심의 ‘지배구조 평가위원회’를 구성, 평가·선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정 면제를 위한 구체적 평가기준·방법과 면제방식은 추가 검토를 거쳐 2분기 중 확정하기로 했다. 외부감사법 시행령 개정 등을 추진해 지정 면제 근거를 마련하고 내년 지정 면제 평가 및 선정시부터 실제 적용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일단 ‘3년 면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지배구조 우수기업 선정이 기존 지배구조 평가방식과 크게 바뀌지 않을 경우 정부의 밸류업 방안은 ‘지정 면제’를 위한 루프홀(빠져나갈 구멍)로 작용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ESG기준원이 최근 몇 년간 지배구조 최우수기업이라고 평가·선정한 상장회사들이 일감몰아주기와 이사회 운영에 문제가 발생하는 등 지배구조와 관련한 평가의 신뢰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와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실질적인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기업의 소유구조 특성을 고려해, 실질적인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기업의 소수지배주주 체계에서는 전체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보다 지배권의 사적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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