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잃은 ‘기술금융’…평가 강화해 기술 기업에 혜택 확대

2024-04-03 13:00:02 게재

은행들 대출한도·금리인하 경쟁 유도

기술신용평가 내실화. 사후평가 강화

중대한 행위규칙 위반시 '허가취소'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금융지원을 해주기 위해 도입한 기술금융제도가 당초 취지와 달리 기술에 대한 부실 평가 등으로 신뢰를 상실했다. 은행들의 실적 부풀리기로 일반대출도 기술금융 명목으로 대출이 이뤄지면서 금융당국이 대대적인 제도 개선에 나섰다. 기술 평가를 강화하고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에 대출 한도 확대와 금리인하 혜택을 주기로 했다.

3일 금융위원회는 김소영 부위원장 주재로 서울 마포 프론트원에서 8개 은행 부행장과 6개 기술신용평가사 대표가 참석한 간담회 자리에서 이 같은 내용의 ‘기술금융 개선방안’을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하락하고 있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을 이뤄내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중소기업이 기술 혁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입된 기술금융이 질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평가 대상 아닌 기업도 기술금융 포장 = 기술금융제도는 담보와 매출은 부족하더라도 기술력이 있는 중소기업에 대해 대출 한도와 금리에서 우대를 주기 위해 출발했다.

금융당국이 은행을 상대로 한 기술금융 실적(테크) 평가에서 신용대출에 대한 배점을 높여 신용대출 증가를 유도했다.

기술평가에서 일정등급(T6등급) 이상을 받은 대출에 한해 기술금융 실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은행들은 실적을 높이기 위해 기술신용평가사에 부당한 요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술금융 대상이 아닌 비기술기업에 대해서도 평가를 의뢰했다. 평가 의뢰와 함께 기술금융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T6등급 이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여러 평가사에 평가등급을 사전 문의하고, 원하는 등급을 제공하는 평가사에 의뢰를 맡겼다.

평가사는 많은 평가물량을 배정받기 위해 은행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술평가 대상이 아닌 생활밀접업종에 대해서도 기술금융인 것처럼 평가해 보고서를 발급했고, 기술금융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회사에 대해 관대한 등급을 주거나 기술금융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허위평가를 했다.

기술금융 물량이 늘면서 은행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경쟁입찰을 도입하고, 일부 은행은 수수료를 물량배정의 중요 요인으로 고려했다. 그 결과 수수료 평균단가는 2014년 82만원에서 2022년 15만원으로 하락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2014년도 평가보고서와 최근 평가보고서를 비교해보면 품질이 크게 나빠진 것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평가보고서 작성시 비용 문제 등을 이유로 현장실사를 생략하거나 평가보고서의 등급이 나온 상세 이유를 생략하기도 했다.

금융위는 “신용정보원의 품질평가 지적사항에 대해 평가사가 이를 개선하지 않아도 별도의 불이익이 없어 문제 개선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지적했다.

◆올해 제도 개선, 기술기업에 우대금리 확대 = 금융위가 밝힌 ‘기술금융 개선방안’에 따르면 올해 △기술금융 우대금리 명확화 △평가의 독립성 강화 △기술신용평가 내실화 △사후평가 강화 △기술금융 규율체계 정비 등이 추진된다.

그동안 기술기업들은 기술금융의 혜택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일반 대출과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제도 개선을 통해 기술등급별로 어느 정도 금리인하를 받는지 알수 있게 된다.

은행은 기술등급별 금리인하 폭을 내규에 반영하고, 대출 실행 후 금리 정보 및 대출 잔액 등을 신용정보원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출실행 후 금리정보는 기술금융 취급 전 금리(최초금리)와 기술등급 우대금리, 실행금리 등을 말하며 기술금융으로 어떤 우대를 받았는지 등이 포함돼야 한다.

금융당국은 은행에 대한 기술금융 실적 평가시 기술등급별로 더 높은 금리인하를 한 은행에 가점을 부여해 금리인하 경쟁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또 기술금융의 신용대출 취급에 대한 가중치를 부여해 담보 위주의 여신 관행을 개선하기로 했다.

기술신용평가사에 대한 은행의 저가입찰 유도도 막는다. 은행의 평가사 물량배정 기준을 평가품질에 맞추도록 하고 물량배정 기준을 투명화하기로 했다. 은행은 물량배정 기준에서 수수료를 제외하고, 평가물량 배정 기준을 평가사에 사전 제공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은행의 물량배정 기준 수립과 평가물량이 기준에 따라 배정됐는지 여부에 대해 사후적으로 점검할 예정이다.

또 은행의 평가사 선정 방식을 '본점이 지점에 랜덤으로 2~3개 추천'하는 형태로 일원화해서 평가사가 지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은행이 등급을 평가사에 사전 문의하거나, 관대한 평가등급을 요청하는 행위 등도 하지 못하게 신용정보법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은행이 비기술기업에 대한 기술평가를 의뢰하지 못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정비하고 사후평가를 강화하기로 했다. 또 비기술기업에 대한 평가서 발급사례가 확인될 경우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실적평가에서 감점을 받게 된다.

기술기업에 대한 신규평가시 원칙적으로 현지조사를 해야 하고, 평가 결과의 근거를 알 수 있도록 세부평가의견 작성도 의무화된다. 또 평가사가 관대한 평가를 하지 못하도록 기술평가의 등급 판정 기준을 강화하고 기술평가 가이던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한편 금융위는 올해 상반기에 신용정법 개정안을 마련, 평가사의 행위규칙을 정비하고 중대한 행위규칙 위반에 대해서는 허가취소 등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갖추기로 했다. 현재는 평가사의 중대한 행위에 대해 제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처벌이 어렵다. 금융위는 “올해 안에 신용정보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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