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위기학생' 치유·예방정책 들여다보기

"오랜 무기력증 치유해준 행복열차"

2017-11-29 10:28:30 게재

숲 치유프로그램, 무너진 자존감 일으키고 '화해·존중' 경험

눈보라를 뚫고 덕유산 향적봉에 오른 학생들.


칼바람이 몰고 온 싸락눈이 덕유산 향적봉 바위에 꽂혔다. 향적봉을 향해 계단을 오르던 아이들은 거센 눈발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에이 씨~ 첫눈은 남친이랑 같이 맞아야 한다는데 이게 뭐야" 유진이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호~ 정상이다. 쌤, 그래도 기분은 째지게 좋아요."

영동곳감을 배경으로 인증샷!


22일 세종시 성남고 1학년 아이들 45명이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에 몸을 실었다. 조치원역에서 새마을호를 탄 아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열차에서 조별 빙고게임을 하며 멘토와 거리를 좁혔다. 도청소재지가 있는 지명을 맞추는 빙고게임에 눈이 반짝였다. 남녀 조별로 정답을 찾느라 열차 안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솔직히 전남 도청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학교 수업보다 100배는 재밌네요"라며 게임에서 받은 선물을 친구들과 나눴다. 기차가 영동역에 서자 "벌써 다 왔네, 더 탔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기분이 좋았던지 한 여학생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쌤, 우리학교 명품(?)이 뭔지 아세요?" 모르겠다고 답하자 '교장쌤과 급식'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학교자랑에 더 열을 올린다. "우리학교 좋은 학교예요. 제가 잘하지 못해서 그렇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세종 성남고 1학년 학생들이 덕유산휴양림에서 오감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영동역에서 내린 아이들은 멘토와 함께 20여분을 걸어 도착한 전통시장 입구에서 '온누리상품권'을 받아들고 시장 안으로 흩어졌다. 여기 저기 식당을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진지했다. 점심식사메뉴를 조별로 결정해야 하는데 의견이 잘 모아지지 않는 분위기다. 서진이가 "날씨가 우중충하고 쌀쌀할 때는 국밥이 최고인데, 친구가 자꾸 빵집에 가자고 해서 설득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인솔교사들은 먼발치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들은 국립덕유산자연휴양림에 여정을 풀었다. 안전강사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던 겨울바람이 아름드리 잣나무 사이를 지나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쌤, 숲에 들어오니깐 속이 후련해요. 이유가 뭐죠?" "나도 숲에 오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너희들이 연구해서 원인을 꼭 밝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오감트레킹에 나선 아이들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서로를 배려했다. 미션을 수행하는 사이사이 멘토에게 숲에 관한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하산 길에서는 친구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뛰었다.

휴양림 강당에서 트레킹 중에 주워온 도토리로 게임을 했다. 숲에 든 아이들은 형식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도시 아이들이었지만 도토리로 하는 '놀이'에 어색해하지 않았고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 게임을 마치고 주워온 도토리는 다시 숲에 돌려줬다. 아이들은 추위를 녹일 간식을 먹으며 붉게 물든 나뭇잎에 친구의 이름을 새겼다.

"저도 잘 할 수 있을까요?" = 덕유산에 밤이 빨리 찾아왔다. 밤 프로그램인 '꽃들에게 희망을'에 참여했다. 에코가방에 색색의 실로 바느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 디자인했다. 강당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자 '우리가 꽃'이라며 웃었다. 미술치유강사 두 명이 조용히 다가가 바느질이 서툰 아이를 도와주었다. "지금은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중"이라며 "친구관계, 가족이야기, 학교생활, 미래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가방을 완성한 아이들은 무대 위에 올라 작품 설명을 했다.

꽃들에게 희망을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학생들.

주희(가명. 1학년)가 "나비가 되고 싶은 애벌레 이야기는 한편의 동화였고, 유치하지 않았다"며 "진로고민을 하는 고교생들에게 용기를 갖게 해주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한 명 한 명 작품 설명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아이들은 평소 입고 싶었던 브랜드를 표현하거나, 친구, 가족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지민(가명. 성남고 1학년)이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 속상하다"며 "그렇지만 학교로 돌아가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눈보라를 뚫고 향적봉에 오른 아이들은 설천봉 휴게소로 내려와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썼다. 60일 후에 받아볼 편지다. 편지를 쓰는 동안 시험을 치르듯 진지함과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전날 밤, 고추장 불고기 냄새에 홀린 아이들이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길게 줄을 선 아이들은 배고프다는 친구에게 양보하거나 음식을 담아줬다. 불고기를 만든 요리사가 긴장하는 눈치다. 요리사는 "아이들이 '학교급식이 대한민국 최고'라며 하도 자랑질을 해댄 덕에 더 맛있는 식단을 꾸려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고 말했다.



정명희 성남고 상담교사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에게 숨통을 터주는 행복한 여행이었다"며 "상담교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숲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학생상담업무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문했다.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는 교육부가 주최하고 충북교육청이 주관하는 '자존감회복과 학교생활 적응력 향상'을 위한 단기여행 프로그램이다. 매년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17~20회 운영하며 '달리는 대안학교'로 불리고 있다.

한 여학생이 SNS 공간에 여행기록을 남겼다.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는 나의 오랜 고민이자 병이었던 무기력증을 치료해준 여행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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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성 기자 hsje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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