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 '미투'에 재판부 '화답'

2018-03-19 10:47:11 게재

'적극적 항거 안했다' 1심 무죄 판결

'언니 위해 희생' 2심 징역 7년 중형

필리핀 처제 성폭행사건 '미투 파장'

이주여성들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에 재판부가 '화답(?)'했다.

2017년 제주에서 벌어진 '필리핀 처제 성폭행' 사건 재판 얘기다. 당시 가해자는 30대 형부였고 피해자는 스무살 필리핀 처제였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적극 항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주여성 미투' 폭로 뒤 열린 항소심에선 징역 7년의 중형이 내려졌다. 미투가 법원 판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광주고법 제주형사1부는 14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강간 등 치상)로 재판에 넘겨진 전모(39)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120시간 이수를 명했다. 전씨는 2016년 11월 피해자의 친언니인 A씨와 혼인신고를 하고 A씨와 A씨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 B양과 함께 생활했다.

전씨는 A씨와의 결혼식 날짜가 2017년 2월 18일로 잡히자 2016년 12월 30일 필리핀에 있던 A씨의 아버지와 오빠, 피해자 C(20 여)씨를 제주로 오게 해 집에서 함께 지냈다. 전씨는 2017년 2월 14일 A씨를 필리핀 국적의 동료와 숙박업소에 머물도록 한 뒤 다음날 새벽 혼자 집에 들어와 거실에서 B양과 함께 자고 있던 C씨를 추행하다, C씨가 잠에서 깨 당황하자 방으로 데려가 힘으로 제압해 강간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씨는 1심과 2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와 성관계를 하면서 반항을 억압하거나 항거를 곤란하게 할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성관계를 거부하지도 않아 동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원심 재판부는 전씨 체구가 크지 않아 단지 C씨 팔을 잡고 위에서 몸으로 누르는 방법만으로 피해자를 강간하기 어려워 보이고 적극적인 항거를 하지 않아 성관계를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고 판단해 전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피해 당일 C씨가 전씨와 단둘이 차를 타고 결혼식 답례품을 찾고, 카페에 가 사진을 찍기도 한 점에 미뤄볼 때 C씨 행동이 강간 피해 당사자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그러나 "C씨가 소리를 지르거나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으로 전씨가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가한 뒤 간음했다"며 항소했다.

2심 재판부는 C씨 피해 진술이 구체적이며 일관성이 있고 '결혼식을 앞둔 언니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다'는 상황 설명도 신빙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 이후에 주변 가족들에게도 쉽사리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예전과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은 친족관계에서의 성폭력 사건에서 이례적이지 않은 점 등에 비춰 보면 C씨가 전씨와 단둘이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었다는 점은 전씨의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벌금 전과 외에 형사처벌 받은 전력이 없음을 고려했다"면서도 "피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범행 내용 등에 비추어 그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이런 2심 판결이 나오기 닷새 전인 9일 이주여성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단체와 함께 첫 미투에 나섰다.

이날 필리핀 출신 통·번역 프리랜서인 오혜진씨는 "언니 결혼식 참석을 위해 제주를 찾아온 필리핀 처제를 형부가 성폭행한 사건이 현재 재판중"이라고 소개하며 "지금 2심 재판을 하고 있는데 피해자에게 정의를 주는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씨는 "2심 재판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일을 더 자세하게 얘기했는데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면서 "그 당시 아픈 마음을 다시 생각하고 하나하나 말하는 것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피해자는 큰 용기를 냈다"고 덧붙였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등 국내 여성단체들도 당시 "한국인 형부가 필리핀 처제를 성폭행했는데 적극적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무죄를 줬다"면서 "폭행 협박이 수반되는 경우만 강간죄라고 하는 법체계는 성폭력 특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 연합뉴스
고병수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