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법원행정처 '강제징용 재판' 판 짰다

2018-08-22 10:54:40 게재

2014년 김기춘-윤병세-박병대 비밀 회동

박찬운 교수 "징용 피해자들 손배청구 가능"

헌재자료 빼낸 최모 판사 검찰조사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강제징용 재판'을 일본 전범기업의 요청으로 피해자들에게 불리하도록 수차례 협의한 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신봉수 부장검사)와 특수3부(양석조 부장검사)는 2013년에 이어 2014년 10월에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황교안 전 법무부 장관,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삼청동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 등 일본 전범기업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재판의 진행상황과 향후 방향을 협의한 정황을 포착했다.

또 2013~2016년 말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등과 외교부 관계자들이 수차례 접촉한 자료도 확보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위 모임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견서 제출의 방식으로 강제징용 재판의 진행상황이 협의되는 과정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

앞선 2013년 12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삼청동 공관에 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 윤 전 장관, 황 전 장관을 불러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과 법관 해외 파견 거래'를 시도한 정황이 포착됐다.

검찰에 따르면 일본 전범 기업 측이 먼저 대법원 재판부에 정부의 의견을 제출받을 것을 촉구하면 대법원 재판부가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요청했고, 외교부가 2016년 11월 대법원 측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의견서를 근거로 강제징용 재판의 재상고심을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회부하는 방안 등을 청와대 측과 협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청와대와 법원행정처는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단 한 차례도 접촉하지 않았다.

대법원 측은 외교부가 합법적으로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낼 수 있도록 민사소송규칙을 개정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2015년 1월 신설된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 2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21일 "개정된 민사소송법이 적용된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대법원 측이 강제징용 재판에 대한 외교부의 의견서를 무리 없이 받아내기 위해 민사소송규칙을 개정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박찬운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2일 내일신문과의 통화에서 "(강제징용 재판에 관여한) 현직 대법관이나 법관의 경우 헌법위반(법관의 독립규정, 권력분립을 규정한 각 규정)은 분명해 징계나 탄핵사유가 될 수 있고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서 직권남용죄가 적용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가능성도 언급했다. "강제징용 당사자들이 대책회의 참석자들과 박 전 대통령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인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실장 등의 대책회의 후 강제징용 대법원 재판이 지연된 사실이 입증되면 그것만으로 불법행위가 돼 손해배상(위자료) 소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법원 측과 청와대 간의 재판거래 정황까지 드러나고 있는 시점에도 법원행정처 국제심의관실은 검찰에 관련 자료 등의 임의제출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20일 "(강제징용 재판과 관련된) 대법원 실무자급에 대한 자료를 직접 받는다거나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는 순서로 수사가 진행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밝혔다. 당시 강제징용 사건을 쥐고 있던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는 현재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검찰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불법 개입 등의 혐의를 규명하기 위해 지난 달 31일 법원행정처 국제심의관실과 문건 작성에 관여한 전현직 판사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임의제출 가능성'이 있고, '문건 내용은 부적절하나 일개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대한민국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 관계자는 21일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을 때도 김 전 비서실장 관련 부분이 소명 자료로 들어갔었다. 박 전 대통령까지 나오는 마당에 (국제심의관실의) 심의관 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검찰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로 헌법재판소 파견 시절 재판관들의 평의 내용 등을 법원행정처에 보낸 혐의를 받고 있는 최모 판사를 22일 오전 10시부터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은 최 판사가 헌재의 정보를 빼돌리게 된 동기와 법원행정처 윗선의 지시가 있었는지 등을 집중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성열 기자 son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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