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우스(제3세계 또는 개발도상국)'에겐 중국 모델이 더 매력적"

2019-11-21 10:53:21 게재

정치적 자본주의에서 시민사회와 대척점에 있는 정부는 주요 경제적 결정에 대해 무한 권력을 갖는다. 미국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뉴욕시립대 교수는 저서 '홀로 선 자본주의'에서 정치적 자본주의의 정의에 부합하는 여러 나라 가운데 다양한 나라를 거론했지만, 그중 중국이 대표적 전형이라고 봤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자본주의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효율성과 기술 전문성을 겸비한 관료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실현할 임무를 띠고 체제를 책임진다. 둘째 자본주의자와 기업가는 체제 내에서 거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지만, 최고권력을 쥘 수는 없다. 국가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상당한 자율성을 갖는다. 셋째 국가가 자본주의자들을 궁극적으로 통제한다. 법에 따른 지배는 미약하다. 정치적 자본주의에서 관료는 목표 달성에 기반해 임명되고 승진한다는 점에서 성과 중시 자본주의의 특성을 띠지만, 정치적 위계질서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성과 중시 자본주의가 합법성 문제를 노출한다면, 정치적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물론 매우 다른 양상이긴 하다. 정치적 자본주의는 한편으론 기술적으로 숙련된 엘리트가 필요하지만, 이들이 법에 따른 지배를 선택적으로 적용해 운용한다는 모순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고질적 부패가 있다. 정치적 자본주의 내에서 거대한 권력을 보유한 정치 엘리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기회를 활용한다. 이런 부패는 정치적 자본주의의 합법성을 약화시킨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엘리트는 관료로만 보이지 않는다. 관료와 기업인의 경계선이 흐릿하다. 엘리트들은 양쪽을 오간다. 또는 같은 계파 내 속하는 개인들이 역할을 분담한다. 어떤 이는 기업에, 또 다른 이는 정치에 파견되는 식이다. 이같은 점에서 마피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정치적 자본주의가 세계 역사에서 일부분 긍정적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본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는 지구상 낙원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예외없이 봉건주의가 타파됐다는 것. 이는 특히 20세기 중반 제3세계 신흥국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외세를 몰아내는 임무, 자국 내 지주나 기타 거물의 권력을 빼앗는 임무 등 이중의 혁명을 수행했다. 밀라노비치는 "사실 이런 두 개의 혁명에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조직은 공산당과 좌파적·민족주의적 정당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미국 싱크탱크 '베르그루엔연구소'의 부소장 닐스 길먼은 "밀라노비치 교수의 주장은 다소 과도하다"며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곳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은 반드시 허물어졌지만, 공산당이 그같은 개혁을 이뤄낸 유일한 정치세력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우파 또는 반 공산주의 정부도 토지개혁 등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대만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한국 등이다. 길먼은 또 "공산당 체제가 파시즘 체제에 비해 더 효율적이었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밀라노비치는 "인류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듯, 하나의 체제 또는 종교가 등장해 반대편을 제압하면 곧 동일한 신조의 변종들이 생겨나는 종파 분립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변종들 간에 갈등과 긴장이 시작된다. 동일한 신조라 해서 갈등과 경쟁이 덜할 것이라 생각하면 금물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밀라노비치는 "자본주의 운영 원리를 공유하는 성과 기반 자본주의와 정치적 자본주의라는 변종 간의 경쟁과 갈등은 과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 경쟁과 갈등 못지 않게 치열해진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성과 기반 자본주의의 대표국이다. 이에 맞서 중국이 장래성 있고 믿음직한 경쟁국이 되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실현가능한 경제개발모델, 둘째 그 모델을 수출하려는 의지와 동기, 셋째 그 모델을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마틴 자크 선임연구원은 10년 전 저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중국은 자국의 개발모델 수출에 별 다른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그는 "문화적 이유가 큰데, 중국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초연함을 지키는 쪽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홀로 선 자본주의'의 밀라노비치는 "외부로부터의 초연함은 중국이 더 이상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며 "최근 미 프로농구(NBA) 선수와 경영자가 홍콩 시위를 언급하자 중국 당국이 NBA 중계를 취소하겠다고 밝힌 것이나 사회신용 시스템을 활용해 국내외 기업들을 평가하겠다고 밝힌 것은, 중국이 경제적 기술적 힘을 사용해 타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한편 글로벌 사우스가 모방할 수 있는 모델로서 중국식 정치적 자본주의의 '실현가능성'을 보면, 중국은 역대급 경제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체제는 수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서구의 모든 개발프로그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빈곤층을 구제했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 경제의 절반 규모에서 이제 어깨를 겨루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구매력 기준으로는 오히려 미국을 추월했다.

중국이 자국 체제를 수출할 의지와 동기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국가가 중국을 통해 배울 가능성을 자진해서 타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이 자국 체제를 수출할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선, 시진핑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 구상'을 보면 된다. 물론 아직까진 정교하게 계획된 프로젝트라기보다 표어나 비전의 성격이 크다. 하지만 중국이 막대한 잉여자본과 풍부한 인프라 개발 노하우를 자국 경계 밖에 있는 국가들과 나누겠다는 건 거대한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은 21세기 글로벌 무역허브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보다 미묘한 주장을 전개한다. 한편으로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성취를 모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상인들을 국가의 이해관계에 복속시켰던 중국의 오랜 역사, 중앙집권 권력과 탈중앙화한 행정의 독특한 결합, 지리적으로나 인구규모로나 광대한 규모 등은 타국이 쉽게 따를 수 없는 측면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경제적 동기를 넘어선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중국의 정치적 자본주의는 권력자들에겐 분명한 이익을 제공한다. 중국의 엘리트들은 여론의 직접적 압력에서 절연돼 있고, 정치적 권력을 통해 경제적 혜택을 얻을 기회를 갖고 있고, 지배 기간에 제도적인 한계가 설정돼 있지 않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사우스 정치 엘리트들의 마음을 얻는 경쟁을 벌인다면, 이 엘리트들에겐 정치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이점이 훨씬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만약 중국이 정치적 경제 모델을 수출하는 데 흥미가 없다면? 미국은 타국의 내정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는 반면 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직접적 영향이 없다면 타국의 내정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한다.

사실 국제적 사안에 대한 중국의 근원적 태도는 자국 모델의 판촉이 아니라 자국 내부의 정치적 안정과 통제에 집중돼 있다. 중국이 경계하는 상황은 1980년대 일본이나 90년대 한국, 대만과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국제 금융기구들은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는 동안 내부 개혁을 강제했다. 중국이 거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쌓아두는 것도 그같은 전략의 일환이다.

원래의 냉전과 현재의 신냉전 사이에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면 소련과 미국 경제는 단절돼 있던 반면 중국과 미국 경제는 깊이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엄마 몸과 태아 사이의 물질 교환이 일어나는 태반을 공유하는 수준이다. 미중 경제가 적어도 현재까지는 긴밀히 연관돼 있기 때문에 양국이 벌이는 신냉전은 이념 경쟁이라기보다 경제 경쟁으로 볼 수 있다.

이 싸움의 최전선은 신기술과 관련해 국제적 기준과 표본을 설정하는 것이다. 중국 화웨이의 5G 네트워킹 인프라 개발과 관련한 갈등이 대표적이다. 정보와 이동통신 기술 영역에서의 지배력은 특히 중요하다. 이런 기술은 정치적 의사소통을 통제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체주의적 감시 기술에 대해 훨씬 적극적이다.

미중 갈등의 핵심은 이념 냉전이나 무역전쟁이 아니다. 기술냉전이다. 기술적 표준과 그에 따르는 상업적 이권에 대한 지배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지정학적 리스크는 기술냉전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용어)을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사우스 지역 국가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경제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의 문제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이는 중국이 이념적 모델을 수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중국의 앞선 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정치적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자체적인 의지와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으로선 그같은 기술을 타국에 판매하고 싶어한다. 즉 중국의 동기는 정치적이라기보다 상업적이다.

하지만 중국이 이념적, 관리적 경제 모델을 수출하는 데 관심이 없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글로벌 사우스 각국에게 자국의 정치적 자본주의와 함께 협력하자고 손을 내미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학 용어로는 '동일구조로의 순응'(isomorphic conformism)이다. 즉 상호작용하는 조직들이 서로의 구조와 과정을 수렴하기 시작한다. 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운영 원칙과 조직 구조, 습관 등을 모방하게 된다. 이념적 이유의 수렴이 아니라 기술적 이유의 수렴이다.

베르그루엔연구소의 길먼 부소장은 "중국이 다른 이에게 정치적 자본주의 모델을 강요하지 않아도 글로벌 사우스의 교역국들은 점차 중국 모델을 채택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모델, 애초의 약속 되살려야

중국의 정치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높아지는 세상에서 미국이 직면한 핵심 문제는 '자유의 가치를 성과 기반 자본주의와 연계해 어떻게 다른 나라들에게 판촉하느냐'는 것이다. 해답은 성과 기반 자본주의의 매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길밖에 없다.

밀라노비치 교수의 말처럼, 성과 기반 자본주의의 본질적 매력은 크다. 문제는 당초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성공에 이르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한다. 또 성과 기반 자본주의는 기득권에게 유리하게 조작된다는 대중의 불신을 불식시켜야 한다. 성과 기반 자본주의가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합법성을 되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몇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첫째 고등교육 접근 기회를 공평히 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의 교육시스템은 초·중·고·대학 매 단계마다 심각하게 계층화됐다. 기득권 엘리트들은 각 단계별 최고 교육기관을 '떼어 놓은 당상'처럼 여긴다.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생의 태반은 소득계층의 하위 50%가 아니라 최상위 1% 부자의 자녀들이다.

밀라노비치교수는 "이는 미국 교육시스템의 합법성을 무너뜨린다"며 "공교육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필수적이다. 세대를 건너 특혜를 물려주는 것을 줄이고 기회의 공평성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둘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 소득이 근로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늘고 있다. 부의 불평등을 줄이려면 자본에 대한 접근 권한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분해야 한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대중 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 개념을 끌어온다. 핵심은 기업의 주식을 연금 부자나 경영자 등 협소한 사람들에게 한정하지 말고 대중들이 쉽게 소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부와 자본소득의 집중을 줄이고 세대간 소득 이동성을 늘리기 위해서 부자에 대한 과세를 늘려야 한다"며 "특히 극소수 부자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줄이려면 상속세를 크게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과 기반 자본주의가 스스로 어긴 원칙을 고친다면, 그래서 상호공생의 관점에서 대중 자본주의의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면, 글로벌 사우스에게 장기적으로 매력을 발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으로 중국의 경우 정치적 자본주의에서 늘 제기되는 전체주의 망령을 떨칠 수 있다면, 정치적 내부자를 중심으로 혜택이 돌아간다는 오명을 개선할 수 있다면, 또 높은 경제성장률과 효율적 행정, 사회적 도전과제에 대한 단합된 대처를 지속할 수 있다면 중국의 체제 매력도는 계속 상승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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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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