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쟁 본질은 성과 자본주의 vs 정치적 자본주의"

2019-11-20 11:43:31 게재

'아메리칸 인터레스트'

미국과 중국의 경쟁을 두고 '신냉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경쟁일까. 전문가들은 '중국모델'에 대칭되는 '미국모델' 또는 '서구모델'을 거론하며 답을 내려 한다. 그 모델은 무엇이고 무슨 목적이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미국 싱크탱크 '베르그루엔연구소'의 부소장 닐스 길먼은 19일 격월간 국제문제전문지 '아메리칸 인터레스트' 온라인판에 '변증법의 습격 - 중국과 자본주의, 신냉전'이라는 기고문을 올렸다. 길먼 부소장은 미국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달 펴낸 신간 'Capitalism, Alone'(홀로 선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위의 질문을 답을 내려 애쓴다. 길먼 부소장에 따르면 밀라노비치 교수는 미중간 경쟁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 불리는 제3세계 또는 개발도상국의 마음을 얻는 싸움이라고 보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의 마음에 얻으려는 경제모델 간 경쟁은 새로운 게 아니다. 과거 냉전의 핵심 이슈였다. 식민지배의 굴레를 벗어난 국가들은 신흥 자본주의 패권국인 미국이 제안한 자유기업 모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소련이 제안한 공산독재 모델을 따를 것인가 고민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글로벌 사우스에 수십억달러의 원조가 이뤄졌다. 광범위한 선전선동도 병행됐다. 수많은 국지전과 반란 등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 전개됐다.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는 나라들에게 어떤 경제모델이 보다 우월한가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예일대 역사학 교수 오드 아르네 베스타가 주장한 것처럼, 냉전은 '어느 쪽이 경제개발에 우월한 모델인가'를 증명하는 이념 경쟁이었다. 독재적 공산주의냐 민주적 자본주의냐, 또 각각의 하위 범주에서 소비에트 중앙통제 방식이냐 마오쩌둥주의냐(독재적 공산주의 범주), 자급자족 복지주의냐 신자유주의냐(민주적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어떤 모델이 가장 우월한지를 증명하는 건 당시의 동시대인들도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 말이 되자 이념전쟁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1989년 여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젊은 정치학자가 글로벌 사우스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이념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번영과 자유를 촉진하는 최적의 시스템은 전 세계적인 기원을 갖는 '시장경제와 결합한 민주적 정치체제'였다. 이와 다른 체제는 이란과 중국 등 몇몇 곳에서만 남게 됐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이 북대서양 지역에 분포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유하는 자본주의의 행태로 구현됐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이 체제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평화적·포용적 정치를 구현하는 우월한 능력을 증명했다. 89년 가을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소련이 지배하던 영역 전반이 자본주의의 전격 도입이라는 충격요법을 받아들였다. 또 80년대 말과 90년대 중남미 전역에 민주화라는 제3의 물결이 덮쳤다. 후쿠야마는 선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어둠의 대항세력'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89년 6월 4일 중국 공산당은 경제개혁개방 정책에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그날 밤 톈안먼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이 절대로 공산독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같은 날 밤 아시아의 반대편 이란에서 이란혁명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서거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예견돼 왔다. 따라서 그로부터 15년 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사망 때와 달리 이란의 독재는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호메이니의 서거를 대하는 이란 사회의 움직임은 반자유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이란의 신권정치 체제가 성공적으로 제도화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중국과 이란의 사례는 극소수 예외였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이론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20세기 말 글로벌 사우스의 그 어떤 지도자도 중국과 이란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안적 개발모델이라고 신뢰하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서구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성과 기반 자본주의는 이념의 관점에서 도전자가 없었다. 중국과 이란, 그외 저항국들은 아직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 이은 경기침체는 서구 민주적 자본주의의 합법성에 의문을 던진 분수령이었다. 금융위기는 세 가지 결과를 냈다. 첫째 금융위기로 미국과 유럽의 많은 국민이 경제적 고난과 금융적 트라우마를 안게 됐다. 수백만채의 집이 압류됐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특히 유럽에서는 국민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재정긴축 정책이 시행됐다. 이는 서구의 경제모델이 과연 약속한 대로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졌다.

둘째 금융위기를 야기한 책임이 있는 이들, 즉 정부나 금융시장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글로벌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금융위기 전 거품을 일으켜 부자가 됐던 이들은 위기 뒤에도 재산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책임 공방에서도 한걸음 뒤에 물러서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는 광범위한 정치적 분노를 야기했다.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적 합법성이 무너졌다.

셋째 유럽과 북미의 불충분한 재정 부양책이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를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위기 이전 수십년 동안의 평균 성장률이 반토막 났다. 반면 중국은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중국 모델이 서구 모델을 대체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 처음 제기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이었다.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서구에서는 '중국이 우리의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서구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증폭된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이 서구의 방법을 따르려 한 적이 전혀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권위에 대한 그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다. 하지만 많은 서구인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중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2005년 9월 4일 기사에서 "중국 게임쇼에서 자유로운 팬 투표가 진행됐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억눌린 요구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칼라일그룹 설립자 데이빗 루빈스타인은 2012년 "중국이 자유를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2013년 말까지도 수많은 학자들이 "중국 앞에는 민주화냐 죽느냐 양자택일이 놓여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많은 서구인들은 '자유화 과정이 더디다 해도 중국은 정치적 자유화와 자유민주적 자본주의로 수렴하는 방향의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수렴으로서의 근대화'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믿는 서구의 많은 이들은 '시간은 서구의 편' 또는 '시간이 갈수록 중국 공산당에게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국에 대한 서구의 태도가 180도 바뀌게 되는 지점은 결국 미래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아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을 거론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공격적인 언사를 쓰는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여론의 변화는 트럼프 등장 전에도 있었고 등장 후에도 있었다.

전 세계 인권단체들은 오랜 기간 반체제인사와 티벳인들을 다루는 중국의 방식을 비난해왔다. 하지만 2014년 신장 위구르 지방에 대규모 감시시설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비난의 목소리는 더 증폭됐다. 기업들도 비슷했다. 광활한 중국 시장을 두드리려던 기업들은 중국의 태도에 계속 실망을 느꼈다. 시장 개방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 지속적인 지적재산권 탈취, 지재권 라이선스 계약 의무화 등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진짜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8년 초 주석제 임기를 페지하겠다는 중국의 선언이었다. 이 선언으로 시진핑 주석은 종신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주석 종신제에 익살스런 표현으로 반응했지만, 워싱턴 외교가는 경악했다. 중국 내부의 당파정치는 외부인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분명하고 단순한 신호였다. '중국은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겠다는 선언이었다.

되돌아 보면 독재 강화에 대한 신호는 시진핑 주석 취임 때부터 있었다. 시 주석이 취임 뒤 정치적 경쟁자인 보시라이를 제거한 것도 그런 신호였다. 하지만 서구 분석가 상당수는 당시 사건을 '사실상 부패를 일소하려는 매우 긍정적인 조치'로 평가하기도 했다. 종신제 선언의 파급력은 중국을 아예 모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반인에게도 확실히 이해될 정도였다. '중국이 느리긴 하지만 서구식 민주주의를 수렴하는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가고 있다'는 워싱턴 정가와 외교가의 판단은 완전히 틀린 셈이었다.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는 워싱턴의 시대정신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사실 트럼프 시대 워싱턴 정가에서 초당적 합의가 이뤄진 몇 안되는 이슈가 바로 중국이다. 여야 모두 입을 모아 중국에 더 강경한 대처를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워싱턴의 모든 이들은 이제 '중국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민주화하려 노력할 의사가 없음'을 또는 '미국이나 서구의 정치체제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런 초당적 전환은 트럼프 등장에 맞춰 우연히 일어났다.

양당제의 미국이 뒤늦게 그것도 불같이 화를 내며 깨달은 건 '자국이 근본적인 투쟁에 갇혔다'는 사실이다. 점진적으로 민주화하는 공산주의 대국과의 투쟁이 아니라, 경쟁자이자 자본주의의 독재국가인 나라와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 중국은 자국만의 정치적 비전이 확고한 나라이자 미국식 모델에 동화될 필요도, 의지도 없는 나라다.

밀라노비치 교수의 '홀로 선 자본주의'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했다. 그리고 동일한 경제원칙에 따라 모든 곳에 침투했다. 법적으로 자유로운 임금노동과 대부분 사적으로 소유한 자본을 사용해 이익을 내려 생산이 조직된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해도 적절한 경제개발 모델을 찾는 글로벌 사우스의 마음을 얻는 지정학적 경쟁까지 종식된 건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와 90년대 신뢰할 만한 자본주의 대안으로 중앙계획경제가 폭발적 힘으로 등장했다. 밀라노비치 교수는 자본주의 틀내에 2개의 이념적 대안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살핀다. 하나는 현행 미국식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자유주의적 성과 중시 자본주의'이며 또 다른 하나는 현행 중국을 가리키는 '정치적 자본주의'다.

성과 중시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은 법에 의한 지배와 정치적 다원주의, 문화적 관용, 공정경쟁 개념을 존중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성공을 이루기 위해 공평한 기회를 받아야 한다고 약속하는 모델이다. 그에 대한 전제는 '신이 부여한 재능'과 '개인의 노력'이다.

하지만 밀라노비치 교수는 성과 중시 자본주의의 최대 위협은 반대편에 있는 정치적 자본주의의 직접적 도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성과 자본주의 질서가 자신의 약속을 배신했다'는 대중의 믿음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서구의 확대되는 불평등, 친지와 자식에 혜택을 주기 위해 시스템을 조작하는 엘리트의 의지와 능력 등에 많은 이들은 '성과 중시 자본주의가 결국 야바위 게임이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이는 결국 우파에서 반자유주의적 포퓰리즘, 좌파에서 신사회주의의 등장을 부추겼다.

성과 중시 자본주의가 후쿠야마가 제시한 역사의 종언에서의 세상이라면, 정치적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중심 정치적 경제'의 형태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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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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