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시국에 옛 잣대 들이대는 기획재정부

2020-04-08 11:03:39 게재

"건전성 도그마에 얽매여 과감한 대응 실패" … 시장현실 어두워 불필요한 국력소모 자초

전대미문의 감염증 사태로 국민들이 고통 받는 가운데 재정당국인 기획재정부가 과거잣대에 얽매여 선제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재정건전성 논리에 연연하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우고 있다는 말이다.

시장현실에 어두워 1차 추경 때는 곳곳에 사각지대가 노출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추가경정예산안을 준비할 때부터 '과감하고 창의적 발상'을 주문했다. 하지만 기재부의 정책대응은 '과거 메르스 대책의 복제판'이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최근 긴급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는 '국민이 체감할 수준의 과감한 재정투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재정 효율성과 건전성' 논리로 맞섰다. 결국 '국민 70%에 1인 평균 25만원 지급'이란 어설픈 절충안이 나왔다. 이 방침은 공개되자마자 형평성·효율성 논란을 빚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8일 "재정 건전성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위기 상황에 맞는 과감한 정책 마련에 실패하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대공황을 불러온 미국의 관료들을 닮았다"고 비판했다.

◆사각지대 노출한 정부대책 = 지난달 17일 처리된 11조7000억원 규모의 1차 추경안은 자영업자들의 유동성 지원이 크게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정부 추경안 자체가 2015년 메르스 당시의 추경안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당시 자영업 대책과 관련, 특히 신용보증기금 등에 대한 보증투입 방식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부가 보증기관에 재정을 투입하고, 이를 근거로 보증기관이 금융기관에 영세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대출을 보증하는 방식이다. 1조원을 투입하면 코로나19 사태로 도산위기에 이른 자영업자들에게 10조원 이상을 저금리로 빌려줄 수 있다. '무상직접지원'방식이 아니어서 '도덕적 해이'나 '선심성 예산낭비'논란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1차 추경 정부안에서 지역신용보증이 대구·경북지역에 3000억원을 보증하는 것까지 합치더라도 보증규모는 1조원 수준에 머물렀다. 국회 처리 과정에서 이를 조금 늘렸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기업 유동성 확보에도 정부 초기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채권시장이 얼어붙어 기업들의 자금공급이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 30조원 이상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조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채권시장이 흔들린 지난달 하순에야 관련 정책을 확정, 늑장대처란 비판을 받았다.

정부는 이후 대통령 주재 비상시국회의 등을 통해 자영업자와 기업 유동성 지원을 위한 추가방안을 내놨다. 그럼에도 이를 보완하기 위한 추가 추경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형국이다.

◆논란 자초한 '절충형 재난지원금' = 최근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당초 지자체나 여당에선 '전국민 대상 재난지원금 지급'을 요청했다. 코로나19로 모든 국민이 어려운 상황인만큼 대상을 폭넓게 하되,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연말정산 등에서 환수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기재부는 '소득하위 50%'로 대상을 못박았다. 결국 당정청 협의과정에서 '70%'로 결정됐다.

하지만 이 가이드라인은 곧 여론의 반발을 불러왔다. 소득하위 기준을 정하는 현실적 방법이 의료보험료 납부금액인데 이 기준이 자영업자들의 경우 2018년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월급생활자들도 2019년 소득이 기준이다. 이 때문에 "올해 2월 이후 본격화된 코로나19에 따른 피해 지원금을 작년과 재작년 소득을 기준으로 지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1인 가구나 자영업자의 경우 정부 기준보다 의보료 납부액이 높아 사각지대라는 비판도 나왔다.

◆재정건전성 정말 문제되나 = 기재부가 과감한 재정투입에 주저하는 이유는 재정건전성과 효율성 문제다.

실제 정부가 전날 발표한 '2019 회계연도 국가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는 12조원 적자였다.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기금수지를 제외해 실질적 재정 집행여력을 나타내는 관리재정수지의 적자(54조4000억원)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재정여력은 세계각국과 비교해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 지적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뒤 경기회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더 과감한 선제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지난해 중앙정부 국가채무(699조원)는 47조2000억원 증가했지만 글로벌 시각으로 보면 양호한 수준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36.5%)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018년 기준 109.2%)의 3분의 1 규모다. 정부가 그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의 상한을 40%로 설정한 뒤 이를 지키려 노력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빨간불이 켜졌다고 보긴 이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재정여력을 코로나19 비상사태 때 써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시스템과 관련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제적 대응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재정대응과 관련해서는 수치상으로 보더라도 선제대응과는 거리가 멀다.

◆GDP 10~20% 투입하는 주요국 = 한국은 올해 본예산 지출액(512조3000억원)이 지난해보다 9.1% 늘며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선 상황이다. 코로나19 대응 1차 추경에 이어 긴급재난지원금 마련을 위해 2차 추경을 편성 중이지만 모두 합쳐도 GDP의 1.2%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국의 경기부양책은 GDP의 10%, 일본은 20%에 달한다. 박 교수는 "미국과 EU 국가들이 발표한 경제안정화 패키지에 들어가는 돈의 규모를 보면 평균적으로 GDP의 11%"라며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은 우리 정부가 더 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지금은 재정건전성을 따지지 말고 민간이 살아나도록 적극적인 공공지출을 해야 할 때"라며 "민간이 살아나야 세수가 늘고 향후 재정건전성이 나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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