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융합 에너지, 주류에 한걸음 다가서

2021-10-20 11:30:56 게재

뉴욕타임스 "잠재력 간파한 모험적 투자자들, 핵융합 스타트업들에 거액 투자"

태양이 빛을 발하는 원리인 핵융합 에너지를 상용화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현실화된다면 향후 수세기 동안 화석연료를 대체할 청정 전력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먼 미래의 이야기 또는 꿈 같은 이야기로 치부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핵융합 에너지에 대한 주류 투자자들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이에 맞춰 핵융합 스타트업의 숫자는 배가되고 있다.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1100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이 핵융합 관련 스타트업에 몸 담으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짓고 있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의 '토카막'.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뉴욕타임스(NYT)는 19일 "핵융합 에너지 부문이 산업의 기틀을 갖춰가고 있다"며 "핵융합 장비에 필요한 초강력 자석부품과 같은 고도의 전문장비를 공급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정부는 최근 핵융합 에너지에 대한 규제법 제정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급성장하는 산업 부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계가 정부 규제다.

NYT는 "핵융합 에너지가 언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핵융합에 대한 민간투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건 지구온난화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또 다른 경고장"이라고 전했다.

영국 핵융합 에너지 스타트업인 '토카막에너지'의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킹엄은 NYT에 "기후변화 위기를 대처하는 것과 관련해 더 우월한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며 핵융합 에너지의 잠재력을 시사했다. 이 기업은 최근 약 2억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주로 민간 투자자들로부터다.

핵융합이란 가벼운 핵들이 결합해 보다 무거운 핵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수소 동위원소인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가열해 원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면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바로 태양과 별들이 에너지를 방출하는 방식이다.

옥스퍼드대 인근 산업단지에 위치한 토카막에너지의 실험실에선 15~20분마다 '실험이 시작되니 모든 사람들은 실험실 밖으로 이동하라'는 경고방송이 나온다. 4.3m 높이에 두꺼운 철제 방어벽을 갖춘 핵융합 장비에서 1초 동안 '윙'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모니터에선 기이한 물결로 고동치는 장비 내부의 영상이 보인다. 강력한 빛줄기가 '플라즈마'로 불리는 초고온의 가스로 발사되는 장면이다.

건설비용 5000만파운드(약 815억원)가 든 토카막에너지의 핵융합 장비는 실험 동안 1100만℃에 다다랐다. 이 기업 과학자들은 올 연말까지 1억℃로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태양핵 온도보다 약 7배 높다.

토카막 에너지 선임 물리학자인 오토 아순타는 "6년 전 이 회사에 합류했는데, 그때보다 지금 직원 숫자가 10배 늘어 180명이 됐다. 연구작업은 보다 복잡해졌다"며 "우리는 세계 최정상급 핵융합 장비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업의 명칭 '토카막'(Tokamak)은 구 소련이 첫 발명한 장비 이름을 땄다. 핵융합 실험에 사용되는 실험장치들 중 하나로, 핵융합 반응에 필요한 플라즈마를 자기장을 이용해 담아두는 도넛 모양의 장치다. 핵융합 분야의 핵심 연구대상이다.

토카막에너지는 2009년 창립했다. 이 기업에 합류한 과학자들은 영국 컬햄 핵융합 연구센터나 프랑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같은 거대 연구기관이 아닌, 작고 날렵한 민간기업에서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ITER은 250억달러를 들여 지름 30m의 거대한 장비를 건설중이다.

당시 그같은 결정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현재 많은 핵융합 스타트업들이 토카막에너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핵융합 스타트업들의 숫자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 소재 비영리 독립기구인 '핵융합산업협회' CEO인 앤드루 홀랜드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중국 등 전세계 7개국에 최소 35개 핵융합 기업들이 있다"고 말했다. 핵융합산업협회와 영국 원자력공사가 조만간 내놓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핵융합 스타트업들은 모두 약 19억달러 자본을 유치했다. 대개 민간 투자자들이 돈을 댔다.

한번도 의미 있는 매출과 이익을 올린 적 없는 핵융합 부문에 왜 투자자들은 돈을 집어넣을까. 투자자들은 잠재적으로 에너지업계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기술의 장밋빛 전망에 이끌렸다고 입을 모은다. 핵융합 에너지는 투입 대비 산출 에너지가 막대하다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상용화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수익을 안겨줄 수 있다.

토카막에너지의 주요 투자자인 데이비드 하딩은 총자산 2700만파운드를 굴리는 투자관리기업 창업자다. 하딩은 "오래 전부터 저렴하면서 무제한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과학적 개념에 매료됐다"며 "하지만 지금은 지구온난화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핵융합에 투자하는 일이 결단이 아닌, 보다 쉬운 선택지가 됐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이미 이익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영국 '과학·혁신 시드펀드'는 토카막에너지에 총 40만파운드를 투자했다. 이곳 투자국장인 마크 화이트는 "40만파운드가 이제 750만파운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의 셈법에 따르면 토카막에너지의 총 시장가치는 약 3억1700만파운드에 달한다.

핵융합 에너지 분야의 또 다른 주요 투자자는 비노드 코슬라다. 선마이크로시스템즈 CEO를 지냈다가 지금은 벤처투자기업 '코슬라 벤처스'의 창업자이자 CEO다. 그는 MIT에서 분사한 핵융합 스타트업 '커먼웰스 퓨전시스템즈'에 투자하고 있다.

코슬라 대표는 NYT 인터뷰에서 "핵융합 에너지처럼 수십년 된 프로젝트에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비결은, 주요 과업을 단계별로 분해해 투자자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커먼웰스는 최근 전세계 가장 강력한 자석에 대한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선언했다. 초강력 자석은 핵융합 연구에 필수적인 요소다. 투자자들이 박수를 칠 수밖에 없는 성취다. 코슬라 대표는 "향후 핵융합 투자라운드에서 투자자들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핵융합 에너지 지지자들은 자석을 비롯한 기타 분야에서의 연구성과가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의 성공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고 입을 모은다. 벤처투자기업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의 투자매니저인 필 라로셸은 "사람들은 핵융합 분야에 대한 투자 수익이 수십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모험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 분야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 이 분야엔 엄청난 진보와 발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가 회장인 브레이크스루는 커먼웰스에 상당액을 투자하고 있다.

핵융합 에너지 분야 과학자들은 "민간의 투자금이 쏟아지고 현존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에 긍정적 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프린스턴대 플라즈마 물리학 연구소 부소장인 조너선 E. 메나드는 "수많은 핵융합 스타트업 가운데 어떤 기업이 성공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연구개발의 질과 양적 측면에서 훌륭한 진전이 있다"고 말했다.

핵융합 스타트업 대표들은 향후 수년 동안 연구개발에 거액이 지출돼야 한다고 말한다. 토카막 에너지는 10억달러 비용을 들여 핵융합 파일럿 장비를 구축할 방침이다. 이 기업이 개발한 지구 중력의 수천배에 달하는 견인력을 가진 초강력 자석을 활용할 방침이다. 이 파일럿 장비는 발전소의 핵심기반이 될 수 있고, 다른 분야에서 상업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핵융합 에너지 업계는 투자자들을 설득해 백만달러 단위의 투자금을 5000만~1억달러로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래야 차세대 시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캘리포니아주 소재 'TAE테크놀로지스'의 CEO 마이클 빈더바우어는 "사람들은 핵융합 에너지에 대한 투자수익률을, 여전히 '한 기업의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등 관행적인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TAE테크놀로지스는 약 9억달러 투자금을 유치했다. 현재까지 핵융합 스타트업이 공개적으로 받은 투자금 중 가장 많은 액수다.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력에 TAE테크놀로지스는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 과정에서 개발한 기술 일부를 다른 분야에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TAE 자회사는 입자빔(particle beams)을 활용한 암 치료법을 개발중이다. 빈더바우어는 "그같은 벤처사업은 투자자들에게 더 쉽게 어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핵융합 에너지 지지자들은 거대 투자자들이 참여 러시를 이룰 때 핵융합 에너지 분야에 티핑포인트가 올 것이라고 본다. 헤지펀드 창업자 하딩은 "일단 핵융합 에너지 분야에 투자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면, 상황이 급변할 것"이라며 "전세계 투자자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핵융합 프로젝트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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