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 피해' 공기업도 손해배상 청구 가능

2022-04-29 11:37:41 게재

대법, 부산지하철 '들러리 건설사' 배상책임 인정

"조달청 통해 입찰해도 수요기관이 청구 가능"

조달청이 낸 사업공고에 입찰한 업체들이 담합을 해 설계보상비를 잘못 지급했다면, 수요기관이 직접 담합 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조달 계약의 직접 당사자(국가)가 아니지만 계약에 따른 수익을 얻는 독립적인 지위에서 수요기관(공기업)이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원심은 입찰 주체가 '국가'이므로, 공기업은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봤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부산교통공사가 대우건설 등 6개 업체를 상대로 낸 설계보상비 반환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9일 밝혔다.

부산교통공사는 지난 2008년 조달청을 통해 부산지하철 1호선 연장 다대구간의 건설공사 입찰공고를 냈다. 당시 입찰공고에는 수요기관이 낙찰되지 않은 업체에 설계비를 보상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겼다.

입찰에는 모두 9개 업체가 참여했는데, 대우건설 등 6곳은 형식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3곳이 낙찰자로 결정되도록 담합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구체적으로 대우건설이 5억5000만여원, 금호산업이 4억7000만여원, SK건설(현 SK에코플랜트)이 5억1000만여원의 설계보상비를 받았는데,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러한 '들러리 입찰 참가'가 부당한 공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이에 부산교통공사는 대우건설 등을 상대로 지급된 설계보상비를 반환하라며 소송을 냈다.

1심은 부산교통공사의 손을 들어줬다. 1심은 "부산교통공사는 이 사건 공동행위로 입찰에 들러리로 참여한 대우건설 등에게 설계보상비를 지급함으로써 손해를 입었다"며 원고 승소판결했다.

반면 2심은 부산교통공사가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심은 "공사 입찰을 공사가 아닌 조달청이 속한 국가가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발주기관인 공사가 설계보상비를 지급한 것은 법령이나 계약에 정해진 의무를 이행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지급할 것을 대신 지급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부산교통공사와 같은 입찰의 수요기관도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조달 계약에서 수요기관은 당사자까진 아니지만 계약에 따른 수익을 얻는 지위에 있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조달청은 수수료를 받고 요청받은 계약 업무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도 했다.

재판부는 "수요기관이 공사계약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수익자로서 조달청과 독립된 지위에서 설계보상비를 지급한 것"이라며 "이로 인해 수요기관에 손해가 발생했다면 불법 행위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어 "공사측은 피고들의 담합행위를 알았다면 설계보상비를 지급하지 않았을 것이라 인정되고 피고들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그런데도 원심은 조달청이 속한 국가와 내부적 관계에서 국가가 지급할 설계보상비를 공사 측이 대신 지급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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