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총수 지정 결국 없던 일로 '경제주권' 훼손 논란

2022-08-11 11:35:55 게재

외국국적 재벌 2·3세 증가하자 공정위, 법령 개정 추진

미국 상무부 반대하니 '부처협의' 명분으로 개정 보류

"경제주권 훼손에 한국 기업 역차별 아니냐" 비판직면

정부가 외국인을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하려던 계획을 결국 보류하기로 했다. 미국이 통상 마찰 가능성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히자 관련 사안을 재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외국 국적 총수 2·3세로의 경영권 승계가 늘어나는 현실을 외면한 결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내기업의 역차별 가능성 등을 들며 '경제주권 훼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구체적인 통상 마찰 가능성이 제기되지 않았는데도 미국 정부 한마디에 제도 개선을 미룬 것은 지나친 저자세 대응이란 것이다. 산업부도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가능성에 대해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국적 총수를 둔 대기업은 규제하지 않으면서, 같은 국내시장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토종' 기업만 규제하는 '역차별'을 초래할 것이란 비판도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11일 "이번 정부 대응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한 것"이라며 "대기업 총수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국내 대기업과 달리 규제를 못하게 되는데, 지금 상황이 오히려 국내 기업들에 역차별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 설명하는 윤수현 부위원장 |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10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동일인의 친족 범위 조정 등 대기업집단 제도 합리화를 위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외국국적 재벌 2~3세 늘어나는데 = 11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공정위는 전날 동일인(총수) 지정 개편 방향을 담은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당초 계획했던 외국인 총수 지정 관련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공정위는 한국계 외국인이 지배하는 기업집단이 등장하고 외국 국적을 가진 동일인 2~3세가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 동일인 지정 기준 마련을 추진해 왔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기업집단과 관련한 각종 신고와 자료 제출 의무를 지고 사익편취 규제도 적용받는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외국인에 대한 동일인 지정 여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공정위는 지난해 쿠팡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했지만 미국 국적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을 총수로 지정하지 못했다.

◆미국 상무부 한마디에 = 그러자 미국 상무부가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실무회의에서 외국인 개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문제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산업통상자원부도 미국과 통상 마찰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공정위에 재검토를 요청했다.

윤수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공정위 차원에서 연구용역 등을 통해 통상 마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관계부처와 사전 협의를 실시했지만 산업부 등 통상당국은 공정위가 마련한 방안이 통상 마찰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정위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 등과 함께 통상 마찰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고 정부 내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추진 방안과 추진 시기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 부위원장은 "지금 단계에서 (내년에도) 김범석 의장의 쿠팡 총수 지정이 불가능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시행령 개정에 소요되는 기간(약 6개월) 등을 고려하면 내년 지정이 쉽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FTA 위반 가능성 크지 않아 = 산업부 당국자도 "FTA 위반 가능성이 있다기보다 공정위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통상 전문가들은 국내 투자자도 같은 규제를 받기 때문에 통상 마찰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 한 관계자는 "외국 기업을 차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국내기업과 동일한 정당한 규제의 경우에는 외국인에게도 충분히 규제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반대입장 표명이 3개월 전인 지난 5월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추가검토가 필요하다"는 정부 입장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상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현재 대기업 총수 2·3세 중 외국 국적자가 상당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인 총수' 지정 문제는 계속 제기될 전망이다. 일례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씨는 일본 국적자다. 신씨는 최근 롯데케미칼 기초소재 도쿄지사 영업·신사업 담당 미등기 비상근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경영권 승계 작업이 시작된 셈이다.

공정위도 외국 국적을 보유한 총수 2·3세가 상당수 있어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당국자는 "현재 알려진 사례는 롯데만 있지만 상당수 그룹의 총수 2·3세가 외국 국적자인 것으로 파악했다"며 "이번 제도 개선은 국내에 거점을 두고 회사에서 총수일가 사익편취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추진했기 때문에 관계부처와 협의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사실혼도 자녀 있으면 친족 포함 = 한편 이날 공정위가 개정한 공정거래법 시행령에는 특수관계인 친족의 범위를 축소하되, 사실혼 배우자를 새로 포함했다.

동일인의 친족 범위를 혈족 4촌·인척 3촌으로 축소하되, 동일인과 본인 사이에 법률상 친자녀를 둔 사실혼 배우자도 친족 범위에 추가한 것이다.

상법이나 국세기본법, 상속세 및 증여세법, 금융회사지배구조법 등은 이미 사실혼 배우자를 친족 범위에 포함해서 규정하고 있고, 주요국도 경제 법령에서 사실혼 배우자를 특수관계인으로 본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특수관계인은 대기업집단 규제를 적용받는 기업집단의 범위 등을 정하는 기준이다. 동일인과 친족 등 동일인 관련자가 보유한 지분이 합쳐서 30% 이상이거나, 동일인이 동일인 관련자를 통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를 계열사로 본다. 동일인의 친족으로 규정된 사실혼 배우자는 계열사 주식 보유 현황 등을 공시해야 하고 사익편취 금지 규제 등도 적용받는다.

다만 공정위는 법적 안정성과 실효성을 고려해 친족에 해당하는 사실혼 배우자의 범위를 '법률상 친생자 관계가 성립된 자녀가 존재하는 경우'로 한정했다.

시행령이 개정안대로 바뀌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거인인 김희영 T&C 재단 이사장과 우오현 SM(삼라마이다스)그룹 회장의 사실혼 배우자로 알려진 김혜란씨가 친족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김 이사장의 경우 지금도 재단 이사장으로서 동일인 관련자로 분류되고 있어 새롭게 특수관계인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롯데그룹의 경우 현재 동일인이 신동빈 회장이기 때문에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사실혼 배우자인 서미경씨는 시행령이 개정되더라도 친족 여부 검토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존에 사실혼 배우자 유무가 알려지지 않은 기업의 사례도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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