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 딜레마 '중국포기 어려워'

2022-11-28 11:04:51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 "굴지의 기업들, 투자철회나 디커플링, 더블다운 결정에 고심"

다국적기업들에게 중국 사업만큼 골치 아픈 일은 없다. 외교적 마찰과 소비자 보이콧은 중국기업들에 위험요소다. 코로나제로 정책에 따라 간헐적으로 생산시설이 봉쇄된다. 최근 광저우시 남쪽에서 봉쇄가 이뤄져 이 지역 공급망이 마비됐다. 중국 주재 유럽상공회의소가 유럽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회원사의 60%가 '중국 사업환경이 악화됐다'고 답했다.

다국적기업들의 한가지 해법은 제조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다. 일부 기업들은 공급망을 중국에서 빼내고 있다. 애플과 장난감 제조사 해즈브로 등의 기업들은 베트남과 인도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다.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는 의류제조사들이 선호하는 국가다.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는 "하지만 많은 다국적기업들에게 중국은 저렴한 제조공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전했다.


중국은 글로벌 의류 판매 수요의 1/4, 보석과 핸드백의 1/3, 자동차의 2/5를 차지한다. 거대한 제조단지 덕분에 중국은 기계도구와 화학제품의 전세계 최대 시장이 됐다. 건설부문 역시 지난 수년 동안 전세계 최대 건설장비 구매자였다.

모간스탠리에 따르면 미국의 상장기업 총매출에서 중국 매출은 4%를 차지한다. 일본과 유럽의 상장기업들의 경우 중국 매출 비중은 각각 6%, 8%다. 그러나 세부내역을 보면 중국시장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이코노미스트가 미국과 유럽 일본의 200대 다국적기업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은 지난해 중국에서 7000억달러를 벌었다. 글로벌 매출의 13%다. 5년 전인 2016년 3680억달러, 9% 비중에서 크게 늘었다.

지난해 중국에서 벌어들인 7000억달러 중 30%는 기술장비기업들의 몫이었다. 26%는 소비자 상대 기업들이, 22%는 산업기업들이 벌었다. 애플과 BMW 인텔 지멘스 테슬라 월마트 등 13개 다국적기업이 중국에서 1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미·유럽·일본 기업, 중국서 매출 13%

미중 지정학적 갈등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곳은 반도체기업들일 것으로 전망된다. 200대 기업 중 22곳이 반도체 분야의 기업이다. 미국이 최신 반도체와 칩제조장비를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이들 기업은 총매출의 평균 30%를 차지하는 중국시장을 잃게 될 전망이다.

중국과 서방의 관계가 불안정해지면서 반도체 등 전략부문 이외에 속한 기업들도 비상전략을 꾸리고 있다.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 등 고급차 제조사들은 중국에서 지속 성장하고 있지만, 폭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GM) 등 중가차 제조사들의 매출은 줄어들었다. 체리와 비야디 등 중국 토종기업들이 빠르게 추격하면서부터다. 스포츠웨어 나이키 매출도 줄어들고 있다. 리닝과 안타 등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이 극심해지면서다.

한국 뷰티기업 아모레퍼시픽 상황도 비슷하다. 중가제품 제조사인 위노나 등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캐터필러와 히타치 등 외국계 건설장비 제조사들도 매출이 줄었다. 중국기업과의 경쟁이 늘어나고 중국 건설업 경기가 침체하면서다. 이코노미스트가 다국적기업의 존재감이 큰 20개 부문을 분석한 결과 지난 3년 동안 다국적기업 비중이 줄어든 분야는 14개에 달했다.

이런 상황이 오게 된 데엔 2가지 요소가 있다는 분석이다. 첫째는 소비재와 관련된 것으로, 외국계 브랜드가 특징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펩시콜라의 아시아태평양 대표인 원 옌 탄은 "다국적 소비재 기업들은 제품을 설계하고 수요를 구축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이는 중요한 경쟁력이었다"며 "하지만 중국기업들이 이를 지켜보고 배우면서 인재를 모았다. 결국 중국기업들이 다국적기업과의 격차를 크게 줄였다"고 말했다.

중국 소비자들의 입맛 역시 바뀌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은 중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차별화시켜 내포하는 제품을 선호한다. 이른바 '국조'(國潮, 애국 마케팅) 트렌드다. 2018년 뉴욕패션위크에서 중국 스포츠용품 기업 리닝이 중국의 문화를 테마로 제품군을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화장품에서 스프까지 거의 모든 제품에 이런 분위기가 확산됐다.

다국적기업 중 특히 중공업 기업들이 고전하는 두번째 이유는 기술적 이점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컨설팅기업 베인의 중국 대표인 웨이웬 한은 "중국기업의 일반적인 전략은 우선 시장의 저렴하고 범용화된 부분을 교란시키고 여기서 경험이 쌓이면 점차 고가의 정교한 상품군으로 올라간다"고 말했다. 폭스바겐 등 자동차제조사들이 고전하는 이유, 건설장비에서 기계도구에 이르기까지 외국계기업들이 프리미엄 시장에서 밀려나는 이유를 시사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외국기업들이 중국시장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중국기업들과 합작법인을 세우는 것은 자동차제조와 기계류 업종에서는 필수조건이었다. 이는 파우스트식 거래였다. 중국기업은 외국의 공학적 전문기술을 점차 흡수했다. 중국정부는 이제 합작법인 필수조건을 완화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중국기업들이 더 이상 외국계기업의 기술적 장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중국과 서방 간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가하는 상황이지만, 중국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전했다.

중국시장과 관련한 3가지 선택지

중국은 그동안 대형 상업비행기를 자체 제조할 전문기술이 없었다. 이 시장은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가 지배했다. 하지만 이달 8일 열린 에어쇼에서 '중국상용항공기공사'(COMAC)가 단거리 수송 여객기인 C919를 선보였다. 조만간 중국 항공사들에 이를 인도할 계획이다. 중국 럭셔리시장을 독점했던 루이비통(LVMH)이나 에르메스 등도 '샹샤' 등 중국 브랜드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극심한 경쟁관계에 놓인 외국계기업들은 중국시장에서의 장기적 미래를 고심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대략 3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투자를 철회하느냐, 탈동조화하느냐, 아니면 더 강하게 밀어붙이느냐 등이다.

일부 기업들은 투자 철회를 선택했다. 프랑스 슈퍼마켓체인 까르푸는 2019년 중국법인 지분 80%를 쑤닝닷컴에 매각하며 20여년의 중국사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 의류소매기업 갭은 이달 8일 중국사업부문을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바오준에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업가치가 남았을 때 사업을 포기하는 선택은 중국 경쟁기업에 우위를 잃었지만 중국시장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기업이 선호하는 선택지일 것"이라고 전했다.

탈동조화는 두번째 선택지다. KFC를 비롯한 기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들은 2016년 중국사업을 분사했다. 이들의 자회사가 중국 사업환경에 보다 쉽게 적응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맥도널드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전략은 지정학적 긴장으로 촉발된 결별의 과정을 단순화하는 장점을 갖는다. 동시에 분사된 기업들은 모기업의 브랜드와 지적재산권에 계속 접근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선택지는 중국에서 자족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기업들에 한정된다. 보잉사나 루이비통처럼 해외에 제조기지를 둔 기업들은 활용하기 어렵다.

세번째 선택지는 판돈을 더욱 키우는(double-down) 것이다. 독일 지멘스는 최근 중국사업 투자를 늘리고 연구개발의 상당비중을 중국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지멘스 CEO 롤란드 부시는 "중국 경쟁기업들을 꺾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13일 24억유로를 투자해 중국기업 호라이즌 로보틱스와 자율주행 합작법인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중국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해야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업들에게 적합한 선택지다. 글로벌 자동차제조사들은 중국기업들에게 입지를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중국기업들은 이미 전기차와 관련 소프트웨어에서 경쟁력을 갖췄다. 다른 시장에 진입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서구의 관계가 화기애애하게 유지된다면 더블다운 전략은 성공할 것이다. 만약 관계가 악화된다면 상황은 악화될 수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