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 못 따라가는 낙후된 남녀관계, 70세 넘어 연애소설 쓸 결심"

2023-11-02 11:24:05 게재

정재룡 전 통계청장, 암투병 이겨내고 장편소설 출간

서울대 법대 시절, 해외근무 당시 주변 경험 글에 녹여

국내 번역된 일본 소설 다 읽어, 일본에서 출간 희망

77세에 장편소설 '오로라와 춤을'을 출간한 정재룡(사진·필명 정다경) 전 통계청장이 세간의 화제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평생 경제관료를 지낸 인사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고 특히 연애소설이라는 점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일 정 전 청장은 내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절반 이상을 남녀 문제로 고민하는 게 현실인데,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다 됐다고 하지만 남녀 간의 문제는 중국보다 더 낙후돼 있다"며 "헤어지거나 이혼하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고 친구처럼 만나지 못하는데, 소설을 통해 보다 성숙한 남녀관계가 형성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정 전 청장이 50년 전 덴마크에서 경제협력관으로 3년간 근무했던 경험과 미국 유학 당시 겪었던 외국의 남녀관계는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컸다. 유럽 젊은이들이 성인이 된 후 경제적 독립체로 시작하는 동거는 단순히 성생활에 국한된 시각에서 볼 게 아니라 남녀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을 이룬 만큼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의식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이번 소설의 주요 토대가 됐다.

'오로라와 춤을'은 대학 시절 미팅에서 만난 남녀가 40년에 걸쳐 2번의 이탈 끝에 3번째 만남을 이어가는 내용이다. 40여년에 걸친 연애사가 현실 속 단 3일간의 시간 속에서 다뤄진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이 소설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고시 합격을 희망하는 우민과 춘천 성심여대에서 수녀를 꿈꾸는 경희가 미팅에서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우지만,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지 못했던 우민과 수동적이었던 경희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랜 시일이 걸려 진심을 확인하면서 끝을 맺는다.

정 전 청장은 "인구 구조의 노령화로 실버 세대가 주요 계층으로 인식되고 있음에도 그들의 연애를 일탈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하다"며 "실버들이 젊었을 때처럼 몸이 따르지 못하더라도 영혼과 감성의 자유를 찾아 용기 있는 모험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책을 쓰게 될 결심은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정 전 청장은 "친구들과 만나 버킷리스트를 얘기하다가 3~4가지를 정하게 됐다"며 "내 글을 보고 서울대 법대가 아니라 국문학과를 갔으면 고생 않고 소설가로 대성공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의 3/4은 유럽과 미국·일본 등 해외를 무대로 나머지는 대학 시절이 배경이다. 법대 시절 친구들과 판검사가 된 친구들의 얘기를 비롯해 정 천장의 직관적인 경험이 녹아 들어갔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글을 쓰는 동안 큰 고비도 있었다. 법대 시절 얘기를 정리하던 초기에 간경화 진단을 받았고, 1년 반 이후에 간암으로 악화됐다. 수술을 준비하면서 젊은 시절 읽었던 '데미안'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다시 봤다.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각도로 읽혔다. 유작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글쓰기에 더 매진했다. 처음 글을 쓰고 4년이 흘러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그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 번역 소설을 대부분 읽었다. 문체와 어휘가 법대 출신, 경제관료들이 쓰는 것과 다른 이유도 그가 읽은 소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정 전 청장은 "이번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일본 시장에서 번역해 출간하고 싶다"며 "일본 장편소설이 번역돼 국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일본 시장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 전 청장은 서울대 법대 65학번으로 1971년 행정고시 10회에 합격해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재정경제부 차관보 등을 지냈다. 1996년 3대 통계청장을 역임했고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캠코 사장을 맡아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인수·정리를 통해 경제 정상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역할을 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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