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원 기자의 외교 포커스│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왜 '외교의 무덤'이 됐나

정부 나서 북한 가입 도와 … MB정부때 대결 장으로 변질

2014-07-30 11:44:02 게재

남북문제, 국제이슈화하려 외교력 낭비 … 올 8월 ARF 계기 남북·한일 외교장관 회담 개최 필요

ARF 외교장관 한자리에 지난해 7월 브루나이 반다르세리베가완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윤병세 외교장관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브루나이>=연합뉴스


다음달 9일 미얀마 네피도에서 제21회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린다. 27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이 외교무대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 문제가 논의된다. ARF는 회원국 간에 구속성 있는 합의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대화를 통한 신뢰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마련한 이 대화의 장에서 남북은 최근 몇 년간 '대결외교'를 펼쳤다. 올해 ARF에서도 얼어붙은 남북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남북이 처음 ARF에서 만났을 때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ARF서 남북 외무장관회의 첫 개최 = 1994년 출범한 ARF에 북한이 가입하게 된 것은 6년이 지난 2000년 태국 방콕 회의 때였다. 북한의 외교적 개방을 원했던 우리 정부는 북한의 가입에 특히 공을 들였다.

국제무대에서 만난 남과 북은 이곳에서 최초로 남북 외교장관회의를 가졌다.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과 백남순 외무상은 이 회담을 위해 특별하게 고안된 U자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U자형 테이블은 남북이 다른 양자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남북은 양자회담 후 "쌍방은 남북 공동선언을 바탕으로 남북 간에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외관계와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협조해나가기로 했다"는 공동발표문을 채택했다. ARF라는 국제외교무대로 남북의 화해 협력 분위기를 확산시킨 것이다.

그 해 ARF 의장성명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관계의 전환점이 되고 이와 같은 대화와 교류의 모멘텀이 지속 발전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한반도 조항이 포함됐다.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한창 가동 중이던 2004년에도 남북은 공동발표문을 내는 등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이 회담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남북 외교당국간 대화 채널 개설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남북은 뉴욕의 유엔대표부를 남북의 외교대화 채널로 활성화시켜 외교 현안을 협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히 이 해에는 예정에 없던 2차 회동까지 열려 남북간 화합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해 라오스 비엔티엔에서 열린 ARF에서도 남북은 대화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당시 북미간 이견으로 6자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ARF에서 만난 남북은 온기를 유지했다. 반기문 장관과 백남순 외무상은 두해 연속 3차례의 회담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2007년 ARF 계기 양자회담에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박의춘 외무상은 2·13합의 2단계 조치인 불능화 이행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한국인 억류사건에 대해 박 외무상은 같은 동포로서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제 무덤 판 '대결외교' = ARF에서 대화 기조를 유지해왔던 남북관계는 남북문제를 국제문제화하려는 우리 정부의 무리한 시도로 냉각기를 맞았다.

2008년 싱가포르 ARF에서 정부는 금강산 피격 사건을 이슈화해 참가국들의 일방적 지지를 얻으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북한과 얼굴을 붉혔다. 전체 회의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금강산 피격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촉구했고 박의춘 외무상은 "그 사건은 남북한 간의 문제"라고 받아쳤다.

외교무대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한 정부는 이미 발표된 의장성명을 수정하려고 하면서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됐다. 의장성명에 한국이 요구한 '금강산 피살 사건의 조속한 해결' 문구와 북한이 제시한 '10·4 남북정상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 지지' 문구가 나란히 들어가자 의장국에 10·4 선언 관련 문구 삭제를 요청한 것이다.

한국의 무리한 요청에 싱가포르는 결국 양쪽 문구를 모두 삭제한 수정본을 다시 발표하는 국제관례상 결례를 범하게 됐다. 우리 정부로서는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불법행위를 강조하면서 고립시키려다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됐다.

2009년 핵실험 문제로 대립했던 남북은 2010년에는 천안함 사건으로 또다시 충돌했다. 베트남에서 열린 ARF는 남북간 신경전으로 폐막 때까지 의장성명이 채택되지 못했다. 뒤늦게 나온 의장성명에는 우리 정부가 요구한 '북한'이라는 주어가 빠진 채 "2010년 3월 26일 공격으로 초래된 대한민국 함정 천안함 침몰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는 표현이 들어갔다. 원하는 문구 삽입의 실패는 외교의 실패로 평가됐다.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는 아세안에서 일방적 지지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부는 의미 없는 외교전을 고수했다. 그러는 동안 ARF는 우리 정부에게 '외교의 무덤'이라는 악명이 붙었다.

◆남북문제와 핵·미사일 문제 구분 필요 = 경색된 상황에서도 유연성을 발휘해 ARF에서의 남북간 만남을 긴장 완화의 계기로 삼은 적도 있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순탄했던 남북관계는 2002년 서해교전으로 고비를 맞았다. 이로 인한 남북간 경색국면은 ARF에서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성홍 외교장관과 백남순 외무상은 회담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슈화해 남북이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당시 최 장관은 ARF 회의장에서 서해 교전으로 인한 긴장고조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북측의 유감표명과 대화 제의에 주목하고 있다고 언급해 여지를 뒀다. 북한도 서해 교전 문제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그해 ARF에서 보인 남북의 태도는 서해교전 이후 조성된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인도네시아 발리 ARF는 2년 여간 경색된 남북관계를 해소하는 장이 됐다. 남북 6자 수석대표 회담이 열려 회담 재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위성락 남측 수석대표와 리용호 북측 수석대표는 2008년 12월 중국 베이징에서의 수석대표 회동 이후 2년 7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이 회동은 '남북한간 최초의 비핵화 회담'으로 기록됐다.

당시 이 회담이 가능했던 것은 미중의 협력 흐름 속에 남북이 천안함·연평도 등 남북문제와 비핵화 문제를 구분해 대응했기 때문이다. 남북간 비핵화 회담 성공으로 추후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외교장관 회담도 3년 만에 열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박의춘 외무상은 경색된 남북관계 진전 노력에 협조하자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대화창구로 ARF 최대한 활용해야 = 아세안 국가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ARF에는 '내정 불간섭'과 '주권 존중'이라는 원칙이 강조된다. '신뢰 구축'과 '협의와 합의'의 정신도 표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세안 국가들은 남북 한쪽에 명시적인 지지를 보내기보다는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아세안의 내적 질서를 무시한 채 일방적 지지를 요청하는 외교는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아세안이 말하는 신뢰 구축과 협의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ARF를 남북간 대화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한반도 긴장 완화에도 도움이 되고 국격에도 맞는 외교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관계를 푸는 첫 단추로 ARF 계기에 한일외교장관회담을 개최하는 방안도 제시된다.

이선진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의 무력도발에 대해서는 우리가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의장성명이 나온다"면서 "그런 식으로 외교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핵문제에 대한 조치를 강구해보자는 등의 제안으로 ARF와 북한을 리드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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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원 기자 hope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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