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원 기자의 외교 포커스│ 미·중 초강대국 틈바구니서 생존 모색하는 한국 외교 2제

위기는 기회, '돌고래 외교'로 국익 신장 나서

2014-10-08 14:19:33 게재

중국 방공식별구역 일방 선포하자 미·중 설득해 KADIZ 확대 … 중국 주도 '아시아 신안보관 제창'에 우리 입장 관철

우리 정부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4강을 상대로 외교를 처음 펼쳤던 것은 6자회담이었다. 4강을 상대로 한 최초의 외교전인 6자회담은 현재 가동되지 않고 있으며, 의제 역시 북한 핵문제로 한정됐다는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지역의 세력지형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 우리 정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4강 외교를 펼치고 있다. 의제도 다양해지고 각국가의 핵심이익도 제각각이다. 자칫하면 냉엄한 국제관계에서 도태될 수도 있다. 특히 G2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지 아니면 현명한 대처로 돌고래 같은 역할을 해낼지 기로에 서있다. 지난 1년간 우리 외교는 KADIZ와 CICA 문제에서 현명함을 발휘해 실속을 챙기는 성과를 거뒀다.<편집자주>

시작은 중국과 일본의 영토갈등이었다. 남중국해에 위치한 조어도(일본명: 센카쿠, 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양국간 분쟁은 2012년 9월 일본 정부의 조어도 국유화 조치로 표면화됐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중국은 조어도를 영해기점으로 설정, 순찰 항해를 시작했고 지난해 11월에는 조어도 지역을 포함한 상공에 대해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CADIZ)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방공식별구역은 자국의 영공 방위를 위해 항공기에 대한 군사적 대응 조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하는 것이다. 영공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 군용기의 비행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비상시 퇴각을 요구하거나 격추시킬 수 있어 군사적 충돌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중 방공식별구역 선포로 긴장 고조= 주변국과 사전협의 없이 이뤄진 중국의 갑작스러운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동북아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중국이 선포한 식별구역이 일본의 방공식별구역과 중첩됐기 때문이다. 동북아 지역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중국이 전통강자인 일본을 향해 안보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후 양국의 중첩된 방공식별구역에서는 상대국의 군용기를 위협하기 위한 근거리 비행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여러 차례 연출됐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 발표한 방공식별구역에는 조어도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 해양과학기지가 설치된 이어도 상공까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교묘한' 구역설정은 우리 정부의 입장을 떠보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처음에 우리 정부는 중국에 '이어도 지역을 제외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작심하고 선포한 구역에 대해 중국이 양보할 리 없었다. 우리는 주권 국가로서 우리의 영공을 포함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대해 단순히 유감 표명으로 그친다면 무력해 보일 수 있고 그렇다고 강경 대응으로 나가기도 곤란했다. 우리 입장을 단호하면서도 과도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맞춤형 외교로 'KADIZ 확대' 공감 얻어=당시 외교부와 국방부 등 관계부처는 한달 여간의 논의 끝에 이어도가 포함되지 않은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이번 기회에 확대 선포하기로 하는 해법을 찾았다. 중국의 일방적 선포로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과 중국까지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우리까지 방공식별구역을 확대하면 동북아 정세가 더 요동칠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사전에 미국, 중국, 일본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갈등요소를 없앴다. 이는 관련국의 입장과 약점을 꿰뚫는 맞춤형 외교를 구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지난해 12월 8일 우리 정부는 그동안 포함되지 않았던 거제도 남쪽의 홍도와 배타적 경제수역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어도까지 확대된 방공식별구역(KADIZ)를 발표했다.

중국의 CADIZ 발표에 반발했던 미국과 일본은 우리의 KADIZ 설정에 대해 사전 조율된 것으로 과도한 조치가 아니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이 새로 발표한 방공식별구역은 다른 나라가 관할하는 분쟁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며 "아울러 국제적 관행과 비행의 자유, 국제영공의 합법적 사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조정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유감을 표명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마터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뻔'한 상황을 적절한 대응으로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KADIZ 재설정으로 그동안 제외됐던 구역까지 확대하는 실리를 챙기는 한편 동북아 지역에서 중견국으로서 위상을 높이는 성숙함과 노련함을 보였다.

특히 KADIZ 확대 조치로 미국에는 한국이 중국의 도발을 묵인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모습을 보였고, 중국에도 우리 정부가 원칙을 가지고 대응한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거뒀다.

2014년 5월, CICA

5월 21일 중국 상하이 엑스포센터에서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의가 열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기조연설에서 "아시아의 일과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직접 처리해야 하며 아시아의 안보 역시 아시아인들이 수호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시진핑의 중국은 대륙의 '굴기'를 꿈꾸고 있다. 중국몽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대한 목표는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이미 2010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 세력 규합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외교안보 측면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중국의 행보는 지난 5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 회의'(CICA, Conference on Interaction and Confidence-Building Measures in Asia)에서 '아시아 신안보관'을 제창한 것이다.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가 수호"= 이 회의 기조연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시아의 일과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직접 처리해야 하며 아시아의 안보 역시 아시아인들이 수호해야 한다"면서 "능력과 지혜가 있는 아시아인들은 협력강화를 통해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시 주석은 또 "주권과 독립, 영토안정을 존중하고 내정 불간섭 등 국제관계의 기본준칙과 각국의 합리적인 안보 관심사를 존중·고려해야 한다"면서 "제3자를 겨냥한 군사동맹 강화는 지역의 공통안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시아판 먼로주의'(유럽 국가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얻거나 서반구의 독립국에 유럽의 구체제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미국의 전통적 외교 원칙)로 평가받는 시 주석의 이 연설은 아시아 각국이 미국 등 다른 지역 국가에 안보를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와 관련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이는 곧 아시아 지역안보 문제에 미국은 손을 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CICA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북아 역내 외교안보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라고 분석했다.

지난 1992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주도 하에 출범한 CICA는 얼마 전까지도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회의체였으나 올해 의장국이 된 중국이 CICA를 아시아 지역 안보협력체로 격상시킬 의지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목이 집중됐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국 중심의 새로운 안보질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진 중국은 CICA 개최를 준비하면서 자국이 만든 공동성명 발표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 중국 주도의 공동성명 초안에 반대 = 중국이 작성한 공동성명 초안은 시 주석이 회의에서 발표한 기조연설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초안에는 '아시아에서 블록과 동맹을 해체해야 한다'와 같은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중국은 적극적인 자세로 회원국을 설득했고 터키, 이스라엘 등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까지도 중국의 성명 초안에 모두 동의했다. 마지막까지 이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었다.

중국이 공동성명 초안 통과에 적극성을 보이면 보일수록 우리가 느끼는 외교적 압박감은 더욱 커졌다. 박근혜 정부 1년여간 구축해온 한중간 친선관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다. 중국이 가지는 경제적 중요성이나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를 고려하면 한중관계는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부담감을 떨치고 외교부는 성명 초안의 부담스러운 문구를 대신할 수정안을 중국에 내밀었다.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해오던 중국은 결국 자신이 만든 초안을 버리고 한국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균형적인 외교 행보로 양국의 신뢰를 모두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가 평소에 한중관계의 발전이 한미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늘 강조했고 그런 전제를 중국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도 지난 6일 열린 J 글로벌-채텀하우스 포럼 연설에서 "우호적인 한중·한미 관계는 매우 유용한 자산이며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이 중국에 경도됐다는 미국의 우려도 상당 부분 불식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정책 담당자들이나 동북아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 주도의 공동성명 발표에 유일하게 반대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이라는 사실을 높게 평가했다.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연구소 실장은 중앙일보 칼럼에서 "상하이에서 한국은 미국 중심 동맹체제의 약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며 또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그 어떤 아시아 지도자보다도 사이가 좋다"고 밝혔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중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조건 끌려가지도 않지만 중국에 해가 되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줬다. 부담감과 압박을 떨치고 원칙을 지키는 외교를 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낸 일거양득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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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원 기자 hope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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