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③ 오종쇄 전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돈' 아닌 '인간 기본권' 위해 싸웠다

2017-08-08 11:06:33 게재

두발자유화가 첫째 요구, 임금인상은 여덟째 … 조선산업 위기 10년 전 예측

1987년 8월 18일 현대그룹 11개 계열사 노조 연합집회는 7·8월 노동자대투쟁의 '백미'였다. 이날 집회에서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정부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노조 인정'을 받아냈다.

이 연합집회 전날인 8월 17일 아침. 현대엔진 노동자 2000여명은 현대중공업 정문으로 향했다. 회사는 밤새 정문을 철 구조물과 배를 만드는 블록으로 쌓고 용접까지 해 놓았다. 망연자실도 잠시 '한 노조간부'가 경비실 팔각정 위로 올라갔다.

"그 누구도 그 어떠한 힘과 재물도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억압의 상징인 저 철책을 넘어야만 합니다!" "와~ !" 정문 돌파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처음으로 함께 모여 집회와 시위를 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이 흥분은 1만여명의 노동자들을 회사 운동장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권용목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 의장을 선두로 정문을 통과해 남목삼거리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다음날 시내진출을 예고했다. 팔각정 위에 올라가 연설한 '한 노조간부'가 오종쇄 당시 현대엔진 교육선전부장이다.

사진 한남진 기자

■팔각정 위 연설을 많은 노동자들이 기억한다.

그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정문에 누가 봐도 질릴 정도로 웅장한 철구조물과 선박용 블록으로 경영진에서 밤새 작업으로 정문을 막아섰다. 함께 간 조합원들이 망연자실했다. 나도 모르게 경비실 팔각정에 올랐다. 인간 마이크를 만들어 외쳤다.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쇠를 만지는 사람들이고 용접구조를 아니까 맨손으로 삽시간에 뜯어내고 운동장으로 모였다. 마이크 준비될 때까지 인간 마이크로 1시간30분 동안 분위기를 돋웠다.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6월항쟁 때 거리에서 선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흉내 내본 거다.

■현대그룹 생산직 첫 노조는 어떻게 만들었나.

용목형을 중심으로 영운형이 1년 넘게 준비를 했고 거의 노조를 만들 때쯤 용목형을 만났다,(권용목, 사영운, 오종쇄를 현대그룹에서는 '권오사'라고 부른다)

노조를 만들다 잘못돼 동료 이름이 나올까봐 전화번호도 외우고 다녔다. 긴장 속에 살았다. 노동법을 공부하고 노사협의회 위원 등으로 일상활동을 하면서 현장기반을 넓혔다. 회사의 감시를 피하고 모든 교대조가 참여할 수 있도록 노조창립총회를 일요일로 정했다. 만약을 대비해 다른 장소에 모였다가 결성식 장소로 옮겼다. 다음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식당에서 보고대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선배가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꼭 잡고 "종쇄야, 이제 사람이 사는 세상이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감격이 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당시 노동자들이 요구는 어떤 것이었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요구는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게 가장 큰 숙제였고 임금인상은 그 다음이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11인 대책위를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한 긴 투쟁을 했다. 임금인상은 요구사항 중 첫째가 아니라 여덟번째였다. 첫째가 두발자유화였다.(당시 경비원 등에 의해 수시로 뒷머리가 깎였다)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임금은 준비없이 다수의 의견을 받아 30% 인상을 요구했다. 이게 나중에 보니 최저생계비와 비슷했다. 최저생계비 데이터도 없는 상태에서 마구잡이였지만 대중이 가진 감각적인 요구와 딱 맞아떨어졌다.

■해고와 감옥생활도 했다.

87년 9월 권용목 위원장이 구속되고 석방을 위해 조합원과 함께 서울 상경투쟁도 벌였지만 같은 해 12월 28일 영운형과 함께 해고됐다. 오랜 기간 해고상태였지만 조합원들의 지원 속에 살았다.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고 해고자 복직투쟁도 하면서 집시법위반 등과 노동법의 독소조항인 '제3자 개입금지'로 4번 구속돼 약 4년 동안 실형을 살았다. 현총련 사무차장. 호주제조업노조에 2년간 파견,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현 금속노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언제 복직됐나. 그 이후 활동은.

현대엔진이 현대중공업으로 합병되면서 현대중공업 해고자가 됐다. 2003년 1월 해고된 지 15년 3일 만에 복직됐다. 대공장 노조 해고자들은 중소기업 노조에 비교해 생계비 지원이 있어 해고자 신분으로 노조활동이 할 수 있었다.

복직 뒤 노사를 설득해 '노동문화정책연구소'를 만들고 소장을 했다. 그때 시작한 프로젝트가 '조선산업의 발전전망과 노사관계 방향'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늘면 자연스럽게 조선업은 사양산업이 된다. 조선업을 좀 더 길게 주력산업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고용안정을 위해 노조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노조 활동가들과 유럽, 일본, 중국 등을 가봤다. 유럽 조선업이 왜 망했는지, 최고였던 일본은 왜 한국으로 빼앗겼는지, 중국이 얼마만큼 따라왔는지 등을 파악했다. 폴란드의 바웬사가 일했던 조선소의 한 노조간부가 우리를 보고 "너희들은 희망이 있다. 우리는 준비를 못했다"는 소리도 전해 들었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실력이 여기까진데. 위기는 곧 기회다. 아직도 우리나라 조선업은 최강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철저한 자기 준비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는데 당시는 못보고 안보인 것도 있다. 지금의 눈으로 10년 전을 평가 할 수는 없다. 당시나 지금이나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반성은 필요하다. 2007년 우리나라 조선업은 절호의 기회였다. 정부는 은행돈을 빌려주고 중국에다 조선소를 짓게 했다. 정작 중국정부는 현대중공업과 경쟁하던 조선소 1000개를 1년도 안 걸려 300개로 줄였다. 전세계 도크장이 포화상태였다. 어디든 줄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조선회사는 배값을 덤핑하고 또 그런 사람을 연임시켰다.

■당시 교섭권을 사측에 위임했다.

순전히 누구 요청이 아니라 욕들어 가면서 추진했는데 철저하지 못해 실패했다. 2007년 노조위원장이 된 뒤 조선업 위기가 닥쳐올 것으로 예상하고 경영진에게 "교섭권 위임을 할 테니 받아라. 대신 구조조정해야 하는데 사람은 자르지 말자"고 한 달 동안 설득했다. '노동3권을 팔아먹었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한 결단이었다. 요구안을 전체 대의원 대회에서 만드는데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6000여명이 모인 실내 체육관에서 설명회도 가졌다. 하지만 경영진은 철저히 대비하지 못했고 분식회계까지 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할 말은 많을 것이다. 나름 근거가 있겠지만 노조는 조합원의 일자리를 지켜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노동시장의 변화를 선도해서 대응해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존재를 잃고 말 것이다.

■노동운동을 되돌아보면

1998년에 민주노총울산본부 고용특별위원장으로 부도난 자동차 부품업체인 영수물산 청산에 참여했다. 현대자동차의 협조를 얻어 일한 사람들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해결될 때까지 물량을 보장받았다. 자재업체에게는 앞으로 현금결제 할테니 지난 것은 따로 받을 것을 제시하며 거래를 유지하면서 청산작업을 마쳤다. 이 경험을 살려 2000년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으로 역시 부도난 대흥기계를 담당했다. 또한 1997년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 과정을 보면서 확고해진 생각이 '고용보다 더 나은 복지는 없다'는 것이다.

■ 최근 근황은.

2009년 노조 위원장을 연임한 후 2011년 현장 복귀했다. 굴삭기 만드는 인도법인 현지화프로젝트팀 팀장으로 일 하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정규직 조합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을 때 사표를 냈다.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최근 조선업이 어려워 9월 1일부터 윤활유를 만드는 회사의 경영자로 옮겨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일할 예정이다.

■ 노동계 일부에서 권용목을 변절자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사람도 변하는 것 아니냐.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변화는 데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역사발전의 도구다. 악역이던 좋은 역이든 역사는 발전하고 도구는 쓰이면 버려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과정에서 자기 계급에 복무하지 않으면 변절자라고 하는 데 모든 사람을 다 변절자라고 하지 않는다. 권용목은 큰사람이었다. 나름대로 자기역할을 다 했고 자기영역을 찾아간 거다. 이를 변절자로 욕할 수는 없다.

■ 지금 노동운동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세상의 변화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노사는 그 변화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노조운동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에 가 있다. 고용시장, 노동시장은 물론 고용형태도 변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는 반면에 기존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치 공룡이 돼 변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대기업, 조직된 노조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에 대한 자기 계획을 못 가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노총이나 산별조직에서 정책연구소를 만들어 조사, 연구, 분석 등 정책역량을 가져야 한다. 연구하지 않다 보니 정책적 대안이 없을 수밖에 없고 벌어지는 상황대처에 급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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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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