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⑩ 주재석 전 한국중공업노조 부위원장

노조활동 통해 진짜 철학 배웠다

2017-09-12 11:06:14 게재

서울대 철학과 출신 "37년 위장취업자" … 1/3은 현장, 1/3은 노조간부로 살아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은 마산·창원으로 확산됐다. 창원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도 그 물결에서 비껴날 수 없었다. 한국중공업은 회사 주도로 노조를 결성했지만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노조로 변화시켰다. 그 중심에 대졸의 '위장취업자' 주재석(60) 전 한국중공업노조(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 수석부위원장이 있다.

충남 천안출신인 주재석은 1975년 서울대 인문계열에 입학했다. 그해 4월 11일 김상진 서울농대생이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5월 22일 김상진 열사를 추도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때 주재석과 동기인 박원순 서울시장 등 많은 1학년생들이 제적됐다.

이런 분위기는 데모라는 것을 몰랐던 주재석을 변화시켰다. 주재석은 친구에 이끌려 1학년 2학기부터 야학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고 박형규 목사가 있던 서울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청계천 '형제의집'에서 10대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동료 야학교사들과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의 수기를 모은 책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을 발행하기도 했다. 1977년 가을 유인물 제작에 연루돼 수배됐다가 다음해 2월에 제적됐다. 그는 더욱 야학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지도교수들이 사회문제 해결에 나서기보다 데모를 막는데 급급한 것을 보고 자신의 꿈이었던 교수에 대한 꿈도 버렸다. 삶의 진실이 학문이 아니라 생활에 있다고 생각했다. 야학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80년 전두환정권이 등장하면서 학생들은 학생운동만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과 함께하지 않으면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는 자각에 많은 청년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투신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1970년대 노동운동 주류가 여성노동자, 경공업, 수도권 중심이었는데 남성노동자, 중공업,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다.

1980년 4월에 복교한 주재석은 1981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3월에 경남 창원 한국중공업 사내 직업훈련소에 합격했다. 대학졸업을 빼고 이력서를 제출한 위장취업이었다. 한국중공업은 발전설비, 산업설비, 선박용 엔진 등을 생산하는 공기업이었다. 직업훈련소를 1등으로 마친 주재석은 원자력발전건설 품질관리부서에서 근무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비파괴검사(초음파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1983년 주재석은 같은 부서, 직업훈련소 동기들과 사귀면서 독서, 축구회 등 모임에 참여했다. 1984년 초부터 최병석 등 10여명의 동료들과 노조를 만들기 위한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1985년 4월 말 검사반 반장이 최병석에게 사표를 강요했다. 반장은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원성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주재석 등은 반장에 대한 불만을 시정해 달라는 연판장을 돌려 담당부서장에게 제출했다. 회사는 반장을 교체하는가 싶더니 5월 초에 주재석 등 4명을 해고했다.

■노동상담 통해 노조결성, 노조민주화 도와

현장에 남아있던 김창근 등 공부모임 노동자들은 5월 중순 노조결성을 시도했으나 정족 발기인 30명을 못 채웠다. 다시 시도한 끝에 6월 24일 노조를 결성하고 김창근을 노조위원장으로 뽑았다. 하지만 회사는 노조위원장 등 노조간부 9명을 해고하고 발기인들을 협박하고 탈퇴를 강요해 결국 노조는 해산됐다. 연판장, 노조결성으로 해고된 노동자가 13명이나 됐다. 이들 중 대부분은 두 달 뒤 복직됐다. 해고자로 남은 주재석, 김창근 등은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신청하고 시간외 수당, 휴일수당을 통상임금이 아닌 기본급을 주고 있는 회사의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소송 등 법적인 싸움에 들어갔다. 주재석은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가톨릭노동상담소에서 마산, 창원지역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상담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학생, 지식인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4·13호헌조치는 불을 질렀다. 노동현장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6·10 민주항쟁 전후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YMCA, 수출자유지역 여성노동자와 기아기공·한국중공업·통일중공업 등의 남성 노동자들이 천주교 밀양공소에서 1박2일 수련회를 가졌다. 주재석은 여기서 가톨릭노동상담소와 함께 노조 만드는 방법, 노조결성 사례 등 프로그램을 교육했다.

7월 21일 동명중공업을 시작으로 마산·창원에도 노조결성 바람이 불었다. 주재석은 노조결성 경험이 없는 대원강업, 현대정공 등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노동자들에게 노조설립신고서, 규약, 회의록 등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노동자들은 서류를 들고 스스로 조합을 만들며 단결해 나갔다.

7월 24일 갑자기 한국중공업에도 노조가 결성됐다. 노동조합 결성 분위기를 눈치 챈 회사가 노조를 결성하려는 주동자들을 관리자들을 붙여 멀리 여행을 보내놓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한국중공업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노동자들은 어용노조에게 "민주노조는 결성 보고대회를 한다. 보고대회를 열어라"며 중식시간 식당을 중심으로 항의를시작했고 8월 5일 열린 보고대회는 자연스럽게 농성과 파업으로 이어졌다. 주재석 등 해고자들도 이에 참여했다. 이들은 회사 정문을 트래일러 등 중장비로 막고 농성을 하며 회사와 협상에 들어갔다. 이윽고 한국중공업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통상임금 지급 등과 어용노조 퇴진을 쟁취했다. 이 과정에서 손석형, 이시형, 이상정과 해고자 김창근은 구속되고 주재석은 수배됐다. 9월 27일 자주적인 조합원 선거를 통해 차경준 위원장과 집행부가 구성됐다.

주재석은 노동자대투쟁 때 노조결성을 위한 법률상담과 노동교육을 지원했다. 같은 기간 마산창원지역에서는 40여개 신규 노조가 생기고 20여개 노조가 민주화되는데 기여한 것이다. 이렇게 결성된 노동조합들은 12월 14일 19개 노조가 모여 지역노조협의회인 마산창원노동조합 총연합(마창노련)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

마산노동교육원을 운영하던 주재석은 1988년 '일꾼노동문제연구원'을 만들어 조합원과 노조간부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1994년 복직됐다. 그는 올해 말 정년을 맞는다. 자칭 '37년 위장취업'도 막을 내리게 된다.

■ 노동자대투쟁 30주년 소감은.

사람이 자주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노동자대투쟁 전에는 노조를 만들자고 쫓아 다녀도 안하더니 때가 되자 자발적으로 노조를 만들게 도와달라고 했다. 밥 먹는 시간을 아끼느라 도시락 싸고 다니며 노조결성 방법과 노동법 상담을 했다. 노조를 안했더라면 인생을 몰랐을 것이다. 노조를 한 덕분에 사람살이를 알고 진짜 철학을 공부했다. 서울 관악에서 '철(哲)학'을 4년했고 창원 귀곡산장에서 '철(鐵)학'을 37년 했다. 사람, 인생, 세상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 대졸출신으로 노조간부를 10여년간 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1/3은 현장노동자, 1/3은 해고자로, 1/3은 노조간부로 살았다. 1996년 수석부위원장에 당선된 뒤 10여년을 노조간부로 있으면서 모신 위원장만 3명이다. 2009년부터 금속노조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연임하고 2013년 검사원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처음 부위원장에 출마하면서 공약 2개를 제시했다. 하나가 '매일 현장 방문'이었다. 80% 이상 약속을 지켰다. 큰 보약이 됐다. 발바닥 철학을 세웠다. 신영복 선생은 삶을 머리가 아닌 가슴, 나중엔 가슴에서 발로 살라고 했는데 나는 우주, 자연을 밟고 다니는 발바닥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바닥으로 다니면서 생각하면 제일 좋은 대안이 나온다. 두번째가 '충실한 일꾼'이었다. 조합원이 주인이고 노조간부는 일꾼이다. 주인이 일꾼을 싫어하는 게 뒷주머니(욕심)를 챙기는 것이다. 일꾼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 언제 복직됐나.

노사협상에서 1990년 4월 김창근 등과 남은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하지만 공안당국이 일꾼노동문제연구원을 이적단체로 몰고 국가보안법으로 수배 중이라 복직하지 못했다. 그해 8월에 구속돼 1년 형기를 마치고 나오자 회사는 1991년 11월 다시 해고했다. 해고자로 혼자만 남아 복직투쟁을 했다. 1994년 노사합의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치활동 등 타 분야나 다른 데로 안가고 곁에 함께 살아줘서 조합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조합원들이 임금인상 손해를 보면서 두 번이나 임단협 등 협상을 통해서 구제해 줬다.

■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격차가 심하다.

대기업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재벌기업이 커지면서 같이 커졌다. 대기업노조와 대기업 노동자를 기득권자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많이 빼앗긴 것의 일부일 뿐이다. 10% 낮은 노조 조직률로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보호가 안된 것이다. 이것을 무조건 대기업 노조가 잘못됐다고 하면 안된다. 대기업 노조 양보, 사회연대기금을 이야기 하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어렵다고 본다. 1987년은 격차가 없었다. 입장과 처지가 같아 단결이 잘됐다. 지금은 당시와 많이 다르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적은 것을 대기업 노동자 잘못인 것처럼 해서는 괜한 불신만 쌓이고 분열만 된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재벌의 폐해, 낮은 조직률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대안이 나온다.

■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 보안사 사찰 폭로’로 ‘미행’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윤 이병의 사찰 폭로로 들어난 1303명 미행 보고서 중 창원지역에서 내가 제일 많은 분량(5쪽)을 차지했는데 한국중공업이 큰 사업장이다보니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 것 같다. 한국중공업에서 해고되고 가톨릭노동상담소, 마산노동상담교육원, 일꾼노동문제연구원에서 활동하면서 항상 미행, 감시를 느꼈다. 해고이후 회사사람을 만나면 바로 회사에서 ‘너 주재석을 만났지’하고 물었다. 조심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출판사 외판원할 때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사이클 선수출신인데 한국중공업에 다니다 안기부에서 교육 받고 오랫동안 여성으로 변장하거나 자전거를 끌고 미행했다’고 고백해서 알았다.

■ 최근 근황은.

정파로 분열된 진보세력을 하나로 모아 진보대연합당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탄생했을 때 노조간부는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했다. 정치사상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기본원칙과 어긋났다. 나 하나라도 원칙을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통합진보당 때도 가입 안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가 헌정사상 최초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민주사회에서 집회결사의 자유가 훼손되는 것을 보고 ‘나라도 나서야 겠다’고 생각하고 2015년에 당원들의 후속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경남민주행동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난해 12월 민중연합당(준) 경남대표, 올해 2월 진보대연합정당 건설 경남추진위 공동상임대표를 맡아 분열된 진보세력을 단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분열은 죽음이고 단결은 생명이다. 헝겊이 찢어지면 바늘로 꿰매듯이 새민중정당, 민중연합당, 노동당 등으로 분열된 진보세력을 바늘로 꿰매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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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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