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연구·평가조차 극단적으로 양극화

2019-06-24 10:48:38 게재

6.10만세운동(6.10)은 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이라는 민족의 공동목표를 위해 이념을 초월해 일으켜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계에서는 학생들이 6.10을 주도한 것은 우발적 상황이 아니라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경험과 전국 규모 단체 등장 등 보다 활발해진 1920년대 학생운동의 총결산 성격이라고 평가한다.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이런 6.10의 역사적 재평가를 위해 지난해 말에 이어 10일 오후 학술대회를 열었다. 내일신문은 기념사업회의 노력에 뜻을 같이 하고 학술대회를 통해 소개된 연구 성과들을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6.10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시기 3대 민족운동이었다. 해방 직후에도 국내에서 전개된 이 운동들은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이 세 운동에 대한 좌우익의 역사적 평가는 신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의 역사와 주체를 정립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신국가 건설의 주체 설정과 정당성 확보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좌우익은 역사 해석에 있어서 입장을 달리했을 뿐 아니라 관련 기념행사와 대중동원에 있어서도 서로 경쟁했다.

해방 후 처음 맞는 6.10만세운동 20주년 기념일인 1946년 6월 10일에 좌익진영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우익진영에서는 그날 대한독립촉성국민전국대표대회를 열었다.

좌익은 6.10만세운동에 대해 노동자, 농민 계층의 성장과 조선공산당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6.10만세운동이 3.1운동 이후 민족상층부인 지주와 자본가가 일제와 협력했고, '비겁한 정객'들이 국외로 도망간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의 조직력과 지도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뚜렷한 지도성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를 농민에게로' 등의 구체적 행동강령을 통해 민족혁명운동을 조직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민족독립운동의 진보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했다.

한편 우익은 6.10만세운동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도성'을 부인하였다. 즉 "누가 어째서 어데서 어떠게 거사를 햇든가는 조선인이면 아는 일"이라면서 "선배지사의 지휘가 없이 순진한 학원의 학생들이 자모자행한 점"이 자랑이라고 평가했다.

우익은 조선공산당과의 관련성을 없애고 오로지 학생 중심으로 6.10만세운동을 설명하였다. 1946년 6월 10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의 6.10만세운동 20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제목이 '학생 중심의 독립운동 육십만세기념식 성대'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조선공산당이 직접 관련된 6.10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해방 직후부터 정치적, 이념적 필요에 의해 극단적인 양극화를 보였다. 이는 이후 학계의 연구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6.10만세운동 연구는 현재 정체되어 있는 상태이다. 연구의 진전을 위한 향후 연구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6.10만세운동 추진주체의 연대과정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해외의 경우 조공 임시상해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병인의용대의 연대 사실이 밝혀졌지만 연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불명확하다. 임시상해부에서 작성한 격문이 의정원 의장인 최창식이 운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인쇄된 것으로 보아 최창식과 임시상해부가 연대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최창식 개인 차원의 지원인지, 임시정부 차원의 연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병인의용대와의 연대에 대해서도 병인의용대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사전협의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떠한 수준이었는지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병인의용대가 임시정부 주변 좌익단체들의 해산을 종용하는 등 반 사회주의 입장이었다는 연구도 있어 조공 임시상해부와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조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국내의 경우 조공과 천도교측의 연대시점 등 세밀한 내용의 보완이 필요하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상부의 보고에 의하면 1926년 5월 1일에 조공 상해연락부의 김 찬이 국내의 박래원에게 직접 시위운동을 지시하였고, 박래원이 5월 10일경 상해에서 들어온 박영식을 통해 거사자금 430원을 받아 권오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공 임시상해부가 천도교측과 직접 연계를 시도했다는 것이 된다. 향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추진주체간 연대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둘째, 6.10만세운동 이후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6.10만세운동 과정에서의 민족협동전선 시도는 이후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과 국내 신간회의 결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후반 국내 학생운동의 질적 변화에도 커다란 추동력이 되었다. 학생들이 독립된 주체로 역할하면서, 학생계의 위상이 제고되었고 국내 독립운동의 중심적 위치로 부상할 수 있었다.

종래 서울 중심의 학생운동 조직이 지방으로 확산되고, 학생맹휴 등이 고조되면서 항일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갔다. 이렇듯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사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사와 계기적 파악이 필요한 이유이다. 국내외 민족협동전선운동, 학생운동, 노동ㆍ농민운동 등 각 부문운동에 미친 영향이 실증적으로 연구되면 6.10만세운동의 민족운동사적 위상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이 글은 10일 서울 종로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6.10만세운동과 민족통합'이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김성민 연구관 (국가보훈처)이 발표한 '6.10만세운동 연구의 성과와 과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편집 편의를 위해 각주 등을 생략했습니다. 원문은 6.10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610manse.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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