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을 재조명한다│④ 3대 독립운동에서 서울지역 학생들의 역할

역사 속에서 '능동적·주도적 역할' 담당

2019-06-24 10:48:38 게재

독립뿐 아니라 정의·자유·평화 실현되는 사회 갈망 … 현재 학생들에게 자부심·책임감 안겨

개항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주권을 상실한 1910년부터는 반제국주의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학생들은 민족운동이 침체되거나 이념차로 분열되면 앞장서 활기를 불어 넣거나 하나로 묶어냈다. 내일신문은 서울시교육청 위탁연구를 수행한 박찬승 교수(한양대 교수)의 보고를 바탕으로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에서 서울지역 학생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100년 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울려 퍼졌다.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전국으로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확산하는 데는 서울지역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또 학생들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을 통해 침체된 항일운동을 재점화 시켰다. 이는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서울지역 학생 독립운동 현황과 공유방안 연구' 보고서를 통해 확인됐다.

시위 참가자와 구속자가 가장 많았던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서있는 6.10만세운동 기념탑. 사진 이의종

 

이에 따르면 학생들은 3.1운동 당시 계획단계부터 참여해 시위를 발발시키고 대중화시키는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주요 추진세력'으로 활동했다. 보고서는 "학생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연합전선에 참가하는 동시에 독자적으로 전위적 시위운동을 전개했다"면서 "특히 독립선언서 배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도 주도 = 서울지역 학생들의 3.1운동 계획은 1919년 1월 6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 등이 보성전문 졸업생 주 익, 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 등과 종로구 한 음식점에서 만나 각 학교 대표를 선정하면서 시작됐다.

전문학교 학생들은 중등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을 참가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여학생들은 별도로 참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마리아 등이 주도했다. 각 학교 대표들은 3월 1일 조례시간을 이용해 만세운동 취지를 학생들에게 전했다. 학생들은 이날 오후 2시 탑동공원(현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아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후 학생들은 시민과 함께 행진했다.

만세운동은 3월 1일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나흘 후인 3월 5일 학생들은 남대문역 앞에서 2차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 인원은 문헌마다 다르지만 시민을 포함해 '수만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두 차례 시위에서 구속된 학생은 167명에 달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충남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와 개성 대룡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상 훈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듬해 3월 1일 학생들은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기념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해 그 정신을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

◆만세운동 징검다리 역할 = 1926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 인산일을 맞아 6.10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당시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계획하고 추진했다. 일제는 군병력 7000여명을 서울에 집결시켰다. 하지만 학생들은 대여(임금의 상여)의 이동 경로에 맞춰 릴레이식 만세운동을 펼친다. 첫 만세시위는 오전 8시 30분경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이선호(중앙고보)의 선창으로 시작됐다. 6.10으로 체포된 학생은 서울에서만 200여명, 전국에서 1000여명에 달했다.

이후 학생들의 재판 진술을 보면 독립을 원하는 열망이 잘 나타난다. 박하균(연희전문)은 "불온문서란 무엇이냐. 그것은 조선독립문서이다."고 진술했다. 또 이선호는 "지금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옥에서 나가더라도 기회만 있다면 독립운동을 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6.10 만세운동이 침체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광주 학생시위 전국으로 확산 = 1929년 11월 3일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번지면서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이처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계기는 12월 초부터 시작된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였다.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시위와 동맹휴학에 참여한 서울지역 학교는 26개교였고 학생은 1만2000여명에 달했다. 이 기간 동안 검거된 학생은 1400여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45명이 구속됐으며 35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일제는 서울지역 학생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각 학교에 휴교령과 이어 조기 겨울방학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학생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이듬해에 더 폭발적으로 전개됐다. 1930년 1월 8일 각 학교의 출결상황 조사에 따르면 이날 1700명(전체 학생의 16%)이 학교에 나가지 않고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15일에는 서울지역 15개 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시위를 했다. 시위는 16일과 18일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3월까지 산발적으로 수업과 등교거부 등의 시위가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의 시위에는 각 학교 내의 여학생 조직과 근우가가 중심에 있었다. 1930년 1월 시위에 참여한 학교는 29개교이며 학생은 3000여명에 달했다.

◆21세기에도 유용한 가치관 = 선언서와 격문을 보면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은 독립, 민주주의 정의 인도 자유 자치 평등 평화 등을 추구했다. 연구보고서는 "학생들은 일제 지배에서 독립뿐 아니라 정의와 인도가 실현된 사회, 자유 자치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 평화가 실현되는 세계를 갈망했다"면서 "세계화, 민주화, 다원화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이와 같은 가치관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20세기 한국사를 돌아보면 중요한 사건마다 학생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학생들이 역사 속 '능동적, 주도적' 위치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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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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