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네마리 용, 미래혁신 스스로 찾아 나섰지만 …

2019-12-10 12:32:48 게재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II

음침하고 유혈이 낭자했다. 잭과 49명의 일행은 수송기에 탑승했고 한 섬에 낙하했다. 임무는 단순했다. 죽느냐 죽이느냐다. 잭과 일행은 수류탄을 집어들고 인근 공장으로 어렵사리 진입했다. 잭은 적의 눈을 피해 쭈그리고 앉아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발각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탄환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긴 침묵이 흘렀다. 잭은 또 다시 레벨 1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모바일 배틀그라운드 '프리 파이어'의 한 장면이다. 올해 전 세계 가장 많은 이용자가 다운로드 한 휴대폰용 게임 중 하나다. 개발업체는 싱가포르의 '시그룹'(Sea Group). 10년 전 창립한 인터넷회사다. 시가총액이 170억달러에 달한다. 시그룹은 프리 파이어 외에 전자상거래 애플리케이션 '쇼피'(Shoppee)도 운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아마존보다 훨씬 인기가 높은 쇼핑앱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시그룹의 성공은 아시아 네마리 용의 경제가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전했다.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네마리 용의 경제가 한창 좋을 때 성장한 대기업들은 정부 정책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한국의 재벌은 저렴한 신용과 세제 혜택의 덕을 톡톡히 봤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은 정부 연구기관의 자회사였다. 홍콩의 재계 거물들은 관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토지정책 등에서 큰 혜택을 봤다. 싱가포르의 거대 기업들은 결국 정부 소유가 됐다.

시그룹은 그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기업의 성공은 정부 정책과는 별 다른 연관이 없다. 싱가포르의 테크노크라트, 즉 경제계획을 촘촘하게 입안하던 과학기술관료들은 다수의 플레이어가 죽고 죽이는 게임, 아름다운 여왕이 무기중개상으로 탈바꿈하는 캐릭터가 포함된 게임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고 리콴유 총리가 봤다면 분명 재미없는 게임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산업정책은 네마리 용의 비상을 가능케 한 요소였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정부 주도 경제개발 모델의 성공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IMF는 전통적으로 정부 주도 모델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 효과가 있다고 해서 선진국에서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네마리 용은 다른 나라의 우수 모델을 따라할 수 있었다. 중공업에 집중키로 한 한국은 일본을 본보기로 삼았다. 대만이 반도체 부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네마리 용은 선진기술 부문 진입을 면허제로 운영하기도 했다. 또 경쟁국으로부터 우수 연구자들을 빼내오기도 했다.

선두 이끌기에서 배후지원으로

하지만 현재의 도전과제는 다르다. 정부와 기업이 미래를 예측할 때 뚜렷함보다 흐릿함이 앞을 가린다. 인공지능(AI)이나 양자컴퓨팅 부문에서 국가전략을 개발하는 게 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베낄 기술이 없다. 아직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혁신이란 본래 미리 내다보고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업들이 밀어붙이고 돌파구를 포착하도록 적절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네마리 용들의 현재 계획은 때로 구식 산업정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은 '5+2 혁신산업 계획'을 내세웠다. 녹색에너지와 스마트기계 같은 부문을 눈여겨보고 있다. 싱가포르는 23개 산업전환 계획을 짰다. 식음료 제조에서 항공산업까지 모든 부문을 망라했다. 한국은 30조원을 투자해 향후 5년 동안 8개 신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AI와 자율주행차 등이 핵심이다.

자세히 보면 과거와 차별성이 확연하다. 톱다운 방식이라기보다 기업과 전문가가 심사숙고한 결과다. 이런저런 부문에 보조금을 내거는 게 아니라 어떤 구성요소가 필요한지 고민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무역산업부 사무차관 게이브리얼 림은 "계획을 구체화하는 과정은 최종 완성품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요소는 명확하다. 항구에서 인터넷까지 질 좋은 인프라, 교역 개방성, 교육 정도가 높은 노동력,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 투자 등이다. 네마리 용이 혁신을 촉진하는 방법도 혁신적이다.

대만은 아이디어는 풍부하나 자원은 거의 없는 중소기업 대출 촉진과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기업실적 정보공유 시스템과 신용보증 기능을 결합했다. 은행들이 보다 자신감을 갖고 대출에 나설 수 있다. 대만 최대 금융기관인 '케세이 파이낸셜 홀딩스' 대표 리창켄은 "우리 시스템을 다른 나라 금융인들에게 설명하면 곧바로 군침을 흘린다"고 말했다. 현재 대만 민간기업에 대한 은행 대출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은 64%다. 2005년 41%에서 껑충 뛰었다.

싱가포르는 거대한 전시공장을 만들었다. 중소기업들이 이곳에서 최첨단 3D 프린팅과 로봇 장비 등을 직접 써볼 수 있다. 홍콩도 비슷한 시설을 운영한다. 괜찮은 사업구상을 가진 기업가는 과거처럼 물주가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네마리 용의 기술관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요즘 굵직굵직한 결정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 중역회의에서 이뤄진다. 폴더블 스마트폰에 대한 삼성의 과감한 투자, 싱가포르 시그룹과 같은 스타트업의 등장, 생산설비 증설에 대한 TSMC의 대규모 투자, 아시아 일류 금융시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홍콩 증시 노력 등이 적절한 사례다. 경제 부문 기술관료들은 자신의 역할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기술진보 위한 사회지지 결집 과제

서울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화성에는 새로운 마을이 들어섰다. 초고속 5G네트워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다른 도시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학교나 세차장, 식당 등 생활편의시설에 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건물들은 모두 가짜다. 정확히는 마을 자체가 가짜다. 한국 자동차안전연구원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시험하기 위해 실제와 비슷하게 만든 곳이다. 최근 기아자동차 자율주행팀은 마을 일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평균 시속 7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였다. 눈부신 햇살과 혼란스런 도로표지판 등 각종 장애물이 있었지만 기아의 자율주행차는 이에 무난히 대처했다는 평가다. 운전석에 앉은 안전 기술자는 차가 스스로 달리는 동안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한국은 자율주행과 관련해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반도체 제조사와 자동차 제조사, 빠르게 늘어나는 5G네트워크 등이다. 정부는 시험장에서 통과한 자율주행차가 실제 도로에서 달리는 것을 허용하는 등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적 컨설팅 기업 KPMG가 선정한 자율주행 최적의 나라 순위에서 13위에 그쳤다. 이유가 뭘까.

이코노미스트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기술발전과 관련한 한국의 양면적 감정 때문이라고 봤다. 대표적 사례가 차량 공유 서비스다. '카카오 모빌리티'나 '타다' 등은 택시 운전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다. 현재까지 4명의 택시 기사가 차량공유 서비스에 항의하는 의미로 분신했다.

기업과 정부가 독려하는 기술혁신은 대중들에 널리 퍼지기까지는 경제 생산성에 보탬이 안된다. 스탠포드대 폴 데이빗 교수가 오래 전에 이를 지적했다. 토머스 에디슨이 첫 번째 발전소를 내놓은 게 1880년이었다. 하지만 제조사들이 이를 전력생산의 킬러앱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40여년이 걸렸다. 결국 1920년대가 돼서야 미국에 다이너모 발전기 조립라인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차량공유 앱에 대한 한국의 경계심은 네마리 용에게 부족한 사회보장 인프라와 대조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자율주행과 같은 새로운 기술에서 발전을 견인할 핵심요소는 어쩌면 고성능 5G 네트워크가 아닐 수 있다. 더 개선된 연금시스템일 수 있다. 기술진보에 뒤처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사회 완충망이 없다면, 기술 진보를 견인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결집시키기 어렵다.

네마리 용은 인적·물적 자원을 신속히 동원하는 데 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는 데도 점차 능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 불안감을 알리는 신호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결집시키는 걸 어렵게 한다.

홍콩 사회불안 어떻게 봐야하나

한때 발전의 도시로 이름 높았던 홍콩이 이제는 시위의 도시로 바뀌고 있다. 벽돌과 화염병, 최루탄 등이 전 세계 가장 비싼 부동산 값을 자랑하는 곳에 난무한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은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와 프라다 매장 앞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홍콩 정부를 포함한 많은 전문가들은 시위의 근본 이유를 경제적 고통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집값, 임금정체, 질식할 것 같은 재벌의 존재 등이다.

홍콩은 각종 불평등의 집산지다. 불가리 매장에 전시된 시계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한달 동안 버는 돈으론 엄두도 못낸다. 시위대가 벽돌을 나르는 데 쓰는 카트는 원래 등이 굽은 가난한 노년 할머니들이 재활용 종이박스를 모아 싣던 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높다. 한 부부가 최근 고급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 한 면을 76만달러(약 9억원)에 팔았다. 1일 주차권 1만4000장(매일 써도 38년 넘게 이용가능한 분량) 가격보다 비싸다.

홍콩 시위의 근본 이유가 경제라면, 시위대나 중국 본토나 안심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신속한 주택 건설 정책이나 보다 누진적인 세제로 중국 정치체제를 훼손하지 않고 홍콩의 불만 요소를 잠재우면 된다. 이는 결국 홍콩을 중국 본토와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홍콩의 친중국 국회의원들이 민간 개발업자들로부터 700헥타르(약 211만7500평)의 부지를 사들이는 제안을 발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싱가포르식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애초부터 '자가주택 비율이 높아야 사회적 안정이 가능하다'고 봤다. 인구 80% 이상이 정부 기관이 지은 주택에 산다. 집을 살 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 싱가포르 경영대 팡속용 교수는 "주거와 관련, 토마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언급한 이상적인 사회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싱가포르"라고 말했다. 소득 하위 50% 가계가 싱가포르 총 주택가치의 약 4분의 1이나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의 문제가 최근 불거진 건 아니다. 오래된 고질병이다. 과거엔 지금과 같은 아수라장을 촉발하지 않았다. 왜 지금인가.

경제적 고통이 시위를 촉발했다면, 시위대들은 진짜 동기를 숨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시위대들은 일자리나 경제 불평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경찰의 폭력성, 홍콩 자치권의 붕괴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홍콩중문대학에 재학중인 한 시위 학생은 "우리는 정부의 어두운 면을 봤다"며 11월 11일 경찰이 직업학교 학생을 총격한 것에 분개했다. 홍콩중문대학에 다니는 프랜시스 리와 동료들이 수천명의 시위대를 상대로 시위 발생 첫 3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의 시위대가 자신을 중산층 이상 출신이라고, 75%의 응답자가 대학 재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중국은 불쾌하겠지만 홍콩 불안은 대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대만은 지난 20년 동안 임금이 정체됐다. 대만 타이베이는 아시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대만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 중 하나는 2014년 '해바라기 시위'였다. 중국과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의 대의명분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 대만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만이 중국과 별개의 국가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경제적 측면이 홍콩 시위의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고 해도, 상당한 타격은 불가피하다. 시위대는 대의명분에 동정을 표하지 않는 기업들을 집중 공격했다. 최근엔 시위대의 사보타주가 대상을 가리지 않는 방향으로 변했다. 한 시위학생은 "우리는 정부에 경제적인 압력을 넣고 싶다"고 말했다.

물리적 피해보다 더 심각한 건 심리적 피해다. 이는 경제적 피해를 심화시킨다. 지난 9월 홍콩의 소매 판매는 전년 대비 5분의 1 이상 줄었다. 관광객 수는 3분의 1 이상 감소했다. 식당과 술집의 매출은 2003년 사스 바이러스 창궐 이후 최대폭 하락했다.

만약 시위가 진정된다면 물리적 피해는 신속히 복구될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 피해, 감정의 앙금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홍콩 관광객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본토인들이 자신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도시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돈을 쓰는 것을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

홍콩은 그럼에도 금융허브라는 역할을 지켜야 한다. 홍콩 증시, 채권시장, 금융시스템은 홍콩의 GDP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요하다. 지역 경제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다. 중국 본토 기업들은 홍콩에서 발행하는 채권의 70%, 항셍지수 가치의 55%를 차지한다.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금융 도관으로서 홍콩의 역할은 시위로 파괴되거나 저지될 수 없는 별개의 인프라에 의존한다. 시위대가 분노에 하늘을 찔렀지만,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는 홍콩 증시 기업공개를 통해 110억달러 이상을 모았다. 2010년 이후 최대 액수다. 홍콩 항셍지수도 시위보다는 미중 무역전쟁에 훨씬 민감하다. 지난 10월 홍콩의 인지세 수입이 280% 폭등했다. 외국인들은 여전히 홍콩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다. 외국인들은 아시아 최고 부자 리카싱의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리카싱은 1960년대 좌파 운동으로 홍콩이 불안할 때 이곳의 부동산을 대거 매입하면서 떼돈을 번 인물이다.

일부 다국적 기업들에겐 싱가포르의 안정성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금융 허브로서 홍콩과 싱가포르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수년 전 홍콩에 진입한 한 싱가포르 금융중개인은 "우리는 홍콩이 아니라 중국에 들어가 경쟁하는 것"이라며 "반면 싱가포르는 중국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곳"이라고 말했다. 즉,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성격이 크다는 것. 그는 싱가포르 금융 전문가들을 양떼를 이끄는 목동에 빗댄 반면 홍콩 금융 전문가들은 거래라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냥꾼에 더 가깝다고 비유했다.

시위대는 홍콩의 특별 지위를 활용해 국제적 이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 의회는 국무부가 매년 홍콩의 자율성을 평가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관세, 세법, 상법 등에서 홍콩은 별도 지위이기 때문에 이 자격을 계속 부여해도 되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다.

반면 중국 본토의 많은 이들은 홍콩인이 본토인보다 훨씬 많은 특권을 누리면서도 불평불만이 그렇게 크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 본토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홍콩의 정치적 야심은 사실 경제적 번영에서 온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홍콩은 중국 본토보다 훨씬 진전된 자유를 누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비슷한 경제력을 갖춘 사회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정치적 권리 측면에서 제한이 크다. 어쩌면 홍콩의 현재 상황은, 1인당 GDP가 높지만 민주주의 지표가 낮은 중동 산유국에 비하는 게 타당할 수 있다. 홍콩의 시위가 사회발전에 위협을 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홍콩인의 현재는 사회발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을 돕는가, 막는가

대만해협은 잠재적 발화점으로 불린다. 좁은 바닷길 건너 중국은 수천기의 미사일을 대만을 겨냥해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설 풍력발전소 '포모사 1'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만해협은 전혀 다른 것이다. 최근 한 엔지니어는 청록색 바다 위 터빈클러스터에서 밖을 내다보며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람이 부는 곳"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완전 가동에 돌입하면 대만 포모사 1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첫 번째 상업용 해상 풍력발전소가 된다. 대만 정부는 향후 여러 기의 풍력 발전소를 계획중이다. 대만의 풍력 활용은 핵발전소를 차츰 줄여나간다는 정책과 맞물린다.

대만의 많은 기업들은 이 정책이 국가 전력, 나아가 경제를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의원들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관련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했다. 2017년엔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해 대만 북쪽 지역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차이잉원 총통은 2025년까지 핵발전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반대측에서는 '목소리만 큰 사회운동가 출신 총통이 정치 시스템을 입맛에 맞게 좌우하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다. 이는 명쾌한 해답이 없는 문제를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경제번영에 득이 되는가 실이 되는가.

이런 의문은 중국에서도 들려온다. 중국 학자 장웨이웨이는 한 에세이에서 "대만이 민주주의 20년 동안 무엇을 보여줬는가. 결국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네마리 용 자체적으로도 나온다. 한국과 대만의 노인세대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장징궈 전 총통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적잖다.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 시기 철권을 휘둘렀던 정치인들이다. 대만 폭스콘의 창립자 궈타이밍은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주느냐"고 말했다.

네마리 용 가운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한국과 대만의 정치 환경이 언제나 자부할 만한 건 아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대통령 7명 가운데 3명은 부패로 기소됐고 한 명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1996년 이후 대만의 총통 4명 가운데 3명은 부패에 연루됐다. 그중 한 명은 19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늘 논란을 일으켰던 영국 정치인 에녹 파월은 한때 "모든 정치적 삶은 실패로 끝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처럼 결말이 안 좋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97년 중국에 넘겨진 이후 홍콩 지도자들의 결말도 민주적 진통을 보여준다. 첫 번째 행정장관은 일찍 사임했고, 2대 장관은 수감됐다. 3대 장관은 너무 인기가 없어 재임하지 못했다. 현재 행정장관인 캐리 람은 시민의 반감을 많이 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성격이 희박했던 지방선거가 최근 열렸는데, 사실상 캐리 람에 대한 찬반 투표 성격을 변했다.

싱가포르는 실적중시주의 전통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부인 리콴유 전 총리의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엘리트 중심 정치의 추악한 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시아 네마리 용이라는 별칭을 처음 얻을 당시엔 어느 나라도 자유경쟁 선거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이후 활발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하지만 나머지 두 곳은 여전히 민주적 정도가 약하다. 대만과 한국의 좌충우돌 민주주의와 싱가포르의 관리된 민주주의, 홍콩의 대표성 약한 정치체제를 비교할 수 있다. 그같은 비교로 알 수 있는 건 뭘까.

한국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까지의 수십년의 기간이 그 이후의 기간보다 경제성장이 빨랐다. 하지만 홍콩과 싱가포르도 현재보다 과거에 더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때문에 네마리 용이 현재 겪고 있는 경제성장 둔화를 민주주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지난 수년 간을 놓고 보면, 싱가포르는 민주화된 한국과 대만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반면 홍콩의 성장률은 더 낮았다.

이와 관련 1996년 기념비적인 보고서가 나왔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로버트 배로가 지나친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재분배 공약이 유권자 다수의 입맛에 맞기 때문에 이를 대거 내세운 후보가 당선되고 그 결과 기업의 투자와 노동자의 근로 동기를 희석시킨다고 추론했다. 그의 통계실험을 보면 중간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최적이다. 싱가포르가 현재 허용하고 있는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가장 적절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MIT의 경제학 교수 대런 애쓰모글루 팀은 민주주의가 한 나라의 1인당 GDP를 장기적으로 약 20% 이상 상승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민주주의가 개방성, 교육·건강에 대한 헌신을 장려한다는 점이었다. 그같은 점을 고려하면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우는 개방적이고 교육과 건강에 많이 투자하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오는 경제적 장점을 일부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애쓰모글루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또 다른 측면은 사회적 불만을 희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마리 용의 최근 경험은 그가 옳다는 걸 증명한다. 2016년 한국인들은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비선 실세 조직에 좌우된다는 걸 알았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수백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왔다. 올해 6월 이후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에 분노한 홍콩 시민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온 것과 비슷하다.

민주적인 한국의 정치체제는 그같은 문제에 대처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의회는 공식 탄핵절차에 돌입했고,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통해 탄핵을 확인했다. 박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수감됐다. 그리고 대선이 치러져 후임 대통령이 선출됐다. 반면 홍콩 캐리 람 행정장관은 스스로 물러날 권한마저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가 기업인들과의 대화하는 도중 힘든 직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던 내용이 유출되기도 했다.

홍콩의 정치체제는 시위대의 분노를 받아안는 데 실패했다. 때문에 경찰이 이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민과 정부의 교착국면은 홍콩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고 있다. 내년에도 갈등은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을 돕느냐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주의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경제에 해를 끼치는 건 확실하다.

네마리 용의 민주주의는 이제 20대가 됐다. 아직 청년기인 이들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려울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대만해협 풍력발전소 포모사 1은 지역 언론으로부터 너무 값비싸다고 계속 혹평을 받고 있다. 게다가 8가지의 환경검토를 거쳐야 한다. 풍력개발 프로젝트 최대 주주인 '외르스테드 아시아 퍼시픽' 대표 마티아스 바우센바인은 "풍력개발과 관련한 언론과 환경 검증 과정이 유럽보다 혹독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통과하면 풍력발전에 대한 대만의 지지는 공고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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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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