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갈 리더는 없다 … 이제는 스스로 앞서 날아야

2019-12-11 11:33:17 게재

이코노미스트 스페셜리포트 III

새벽 4시30분이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서울 남구로역 앞 도로에 모인다. 열차를 타러 온 게 아니다. 운행은 1시간 더 있어야 한다. 순대나 샌드위치 등 야식을 사러 나온 것도 아니다. 일당 노동을 하러 나온 이들이다. 주로 건설공사 일용직이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거나 쭈그려 앉거나 기침을 한다. 대부분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대개 걸걸한 중국어를 쏟아낸다.

한국은 한때 순 노동수출국이었다. 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도로를 건설했다. 손전등을 켜고 밤샘작업도 마다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구로역에는 중국인을 포함한 이민노동자들이 모인다. 이들이 한국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고 있다.

아시아 네마리 용들도 일자리를 걱정한다. 하지만 이들 나라의 실업률은 질투가 날 만큼 낮다. 4%가 채 안된다. 대신 중장기적 우려가 크다.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일을 할 젊은이의 부족이다. 전통적으로 노동가능인구로 분류되는 15~64세의 인구가 4개국 모두 빠르게 줄고 있다. 네마리 용 모두 예외없이 2040년이 되면 65세 이상 인구 대비 노동가능인구 비중이 현재의 일본보다 낮아지게 된다.


네마리 용의 출산률은 전 세계 하위 10위권에 속해 있다. 각국 정부는 이런 흐름을 반전시키려 애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일부 나라에선 정부가 결혼주선에 나서기도 한다. 싱가포르 사회개발네트워크는 결혼 적령기 독신 남녀들이 참여하는 저녁식사와 영화 감상, 보드게임 이벤트를 마련한다. 대만에선 정부가 여러 사람을 돌아가며 만나는 스피드데이트나 자전거 여행 등을 주선한다. 하지만 대만의 한 고위관료는 "전혀 소용이 없다"고 냉정히 평가했다.

이유 중 하나는 네마리 용의 근로문화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광고홍보일을 하다 최근 잦은 야근에 지쳐 일을 그만둔 조이스 양은 "나라가 국민을 직장에 묶어두고자 하는데, 출산율이 낮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반문했다. 한국 정부는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조이스 양은 보다 과감한 방법을 택했다. 호주 이민이다. 그는 현재 호주에 살면서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SNS 친구들에게 '일중독에서 빠져나오라'고 선동한다. 그는 "대만인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산을 막는 첫째 제약요소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비용이다. 사회 전체가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이들의 활동에서 혜택을 본다고 하지만, 이들을 키우는 비용은 정확히 한 집단에 지워진다. 바로 가임연령기 여성이다. 남편의 도움도 쥐꼬리, 국가의 보조도 쥐꼬리인 상황에서 초보 엄마에게 가해지는 가사와 육아, 맞벌이의 하중은 버거워도 너무 버겁다. 때문에 한국의 많은 여성들은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되도록 늦게, 만약 아이를 갖는다 해도 1명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들의 어려움은 네마리 용이 가장 자신있게 내세우는 '그 어떤 것' 때문에 더 가중된다. 바로 높은 교육열이다. 네마리 용 모두 상당히 괜찮은 공교육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많은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값비싼 사교육에 돈을 아끼지 말라는 유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물론 이런 노력과 투자가 자녀의 지적 수준이나 미래 생산성 고양에 보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은 단지 간판, 즉 학벌을 노린 것이다. 유명대학에 입학시켜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어떤 면에서 네마리 용의 사교육 열풍은 '군비확장 경쟁'과 유사하다. 어떤 부모가 사교육에 돈을 쓰면 다른 부모도 이유를 불문하고 따라 한다.

한국 정부는 무분별한 사교육 열풍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대학을 단일 네트워크로 묶어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고용주들에겐 대학 간판을 근거로 직원을 뽑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조치는 아직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측에선 '능력주의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능력'과 '능력으로 보이려는 시도'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며 "능력은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능력으로 보이려는 시도는 해롭다. 네마리 용 부모들은 용의 활력을 꺾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간 줄이고 노동연령 늘여야

인구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네마리 용은 노동시간 줄이기와 노동연령 늘이기를 혼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싱가포르인 네오 퀴 렝은 환갑을 앞두고 중소 상공인으로서의 인생을 포기했다. 대신 노인복지기관인 '러빙하트센터'에서 인생2모작을 일구고 있다. 은퇴한 게 아니라 관리자로 합류했다. 앞선 직업에 비해 일거리가 수월한 것도 아니다. 매일 100여명의 노인을 상대하고 관리한다. 노인들은 각기 다른 요구사항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건강검진을 위해, 또 다른 이는 우쿨렐레를 배우러 센터에 온다. 대화 상대가 필요해 센터를 찾는 노인도 많다.

네오 씨는 센터 관리 기법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엑셀과 데이터 분석을 공부중이다. 시력이 약해진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는 노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는 세미나도 운영한다. 정부가 노인의 평생학습을 장려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네마리 용에서의 평생은 정말 길 수 있다. 출산율이 낮기 때문에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현재 60세라면 평균적으로 또 다른 25년을 살 수 있다. 엑셀과 우쿨렐레를 익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네마리 용이 고령화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은 보다 많은 이민을 허가하는 것이다. 대만의 외국인 노동자 비중은 6%다. 한국은 3.3%다. 서구 기준에선 크게 낮다. 하지만 일본 기준에선 높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비중은 2%에 불과하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우 이민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다. 홍콩 인구의 39%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 중국 본토 출신이 220만명에 달한다. 외국 출생자들은 법원과 정부기관, 경찰 등에서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38만여명이 가정부와 보모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비중은 전체 노동자 중 8% 이상이다.

싱가포르엔 14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전체 노동자 중 3분의 1이 넘는다. 저숙련 일자리를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2013년 정부백서에 따르면 2030년 싱가포르 인구는 69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는 570만명 수준이다. 이민에 개방적인 싱가포르라지만, 이민 급증에 점차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프라와 공공서비스에 과도한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다. 싱가포르에서 거리 시위는 매우 드믄 광경이다. 하지만 이민과 관련해 수천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싱가포르인을 위한 싱가포르를 만들자'는 구호를 외쳤다.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 노동수입, 즉 이민만은 아니다. 자본수출도 있다. 네마리 용은 해외에 빌려주고 투자하면서 자본을 수출할 수 있고, 또 수출하고 있다. 4개국은 외국 노동력의 산출물에 대한 청구권을 차곡차곡 축적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 외국 투자자산에서 나오는 연간 순수입이 시민 1인당 2500달러에 육박한다.

네마리 용은 무역수입보다 수출이 많다. 해외 투자를 위한 자본을 많이 쌓아뒀다. 지난해 싱가포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18%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아직 비난을 던지거나 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곧 변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아시아 용 네마리를 주시하고 있다.

뒤에서 나는 거위들

아시아 네마리 용이 한창 잘 나갈 때에도 이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25년 전인 1994년 12월 미국 경제학자 폴 그루그먼은 포린어페어스 기고 '아시아 경제기적의 미신'에서 "아시아의 역동적 경제가 보여주는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효율성이 개선됐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4개국 경제성장은 노동과 자본의 투입을 급속히 늘려서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땀'(perspiration)에 기반한 경제기적이었다는 것. 크루그먼은 특히 싱가포르의 경우 소련의 스탈린이 무덤에서 기뻐할 정도로 자원을 강제 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땀을 통한 성장 모델은 자연스런 한계에 부닥쳤다. 크루그먼 교수는 "고용률이 계속 늘 수는 없는 법, 자본축적은 결국 이윤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며 "네마리 용의 경제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장둔화에 대한 그의 지적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았다. 4개국은 2010년대 들어 평균 3%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90년대 초 8%에서 하락했다. 하지만 '땀'과 '영감'의 혼합은 크루그먼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노동 투입이 점차 줄면서 '총요소 생산성'이 보다 큰 기여를 했다. 총요소 생산성은 정해진 노동, 자본, 원자재 등 '눈에 보이는' 생산요소 외에 기술개발이나 노사관계, 경영혁신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부문이 얼마나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는가를 나타내는 생산효율성지표다. 일본 도쿄 소재 아시아생산성기구(APO)에 따르면 2000~2017년 네마리 용의 총요소 생산성은 미국 대비 최소 2배 이상 높았다.

네마리 용이 가장 두려워하는 비교는 소련의 스탈린식 산업화가 아니다. 일본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경제침체다. 구매력 기준 일본의 1인당 GDP는 1990년 기준 미국의 85%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70%로 하락했다. 일본의 장기 불황 이유 중 하나는 고령화다. 모나코를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늙은 나라다. 하지만 다가올 30년 네마리 용은 일본보다 더 빨리 고령화된다. 이들 나라는 많은 부분 일본의 경제모델을 따랐다. 한국과 대만은 서비스보다 제조업이 강하다. 또 네마리 용 모두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성공을 따른 것처럼 일본의 실패도 되풀이할 것인가.

물론 일본처럼 표류한다고 해도 이를 실패로 보긴 어렵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은 중진국 함정을 걱정한다. 일본식 침체에 빠지는 것조차 이들에겐 부러움이다. 하지만 네마리 용은 여전히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또 네마리 용은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은 만큼 다른 점도 많다.

일본의 버블 시기와 비교하면, 네마리 용은 금융 보수주의를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시장의 붕괴를 경험한 덕분이다. 네마리 용은 은행들을 상대로 두터운 자본 완충망을 다그쳤고, 대출과 관련한 거시건전성 정책을 개척했다. 게다가 네마리 용은 글로벌 교역 시스템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고 글로벌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대단한 결의를 보이고 있다. 세계경제포럼 선정 '글로벌 경쟁력 지수'나 세계은행 선정 '사업하기 쉬운 나라' 순위에서 네마리 용은 모두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네마리 용이 휘청거린다면, 일본의 실수를 되풀이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재적인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만의 경우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히는 것을 줄이려 한다. 하지만 중국은 명실상부 아시아 경제의 중심에 있다. 대만의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경제권력이 소수 기업에 집중돼 있다. 공평한 시스템으로의 요구가 거세지만 정부의 대응법은 효과가 없었거나 반 생산적이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관리적 정치체제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이민에 대한 반발을 보면, 싱가포르조차 전 세계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포퓰리즘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홍콩은 후퇴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용이다. 홍콩 시민들은 성공했고 세련됐다.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그럴 마음이 없다.

네마리 용에 필요한 건 현실감각 유지다. 잘못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지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들이 그만큼 많다. 네마리 용 각자 풍부한 장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개발 발전소로 등장했다. 스마트폰에서 아이돌 가수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대만은 지정학적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지만, 스스로를 글로벌 공급망의 필수요소로 만들었다. 또 중소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안팎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홍콩은 명실상부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금융도관이다. 싱가포르는 네마리 용 중 으뜸을 달린다. 소규모 도시국가임에도 경제다각화에 성공했고, 부동산과 관련해 전 세계 곳곳에서 치솟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네마리 용의 미래는 전 세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들의 경제성장 기적은 다른 개발도상국에게 생생한 참고서가 된다. 지난 20년 네마리 용의 경험은 중진국이 어떻게 더 높은 위치로 상승하는지 보여줬다. 선진국들도 네마리 용이 미래를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관심이 많다.

네마리 용은 미래를 개척하는 시험지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동시에 선진국을 두렵게 하는 수많은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갖고 있다. 자동화의 영향에서 노동자를 어떻게 보호할지, 생산성 증대를 어떻게 되살릴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지, 임금정체와 치솟는 부동산 가격 문제를 어떻게 헤처나갈지 등이다.

'네마리 용'이라는 별칭을 얻기 전 4개국을 가리키는 비유는 '일본 뒤를 따르는 기러기들'(flying geese)이었다. 기러기들은 리더의 뒤를 따르는 게 훨씬 쉽다. 리더의 날개가 만들어내는 추가 부양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의 비유가 망각한 게 있다. 기러기들은 리더와 추격자 역할을 교대한다는 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홍콩과 싱가포르, 대만과 한국은 선진 경제의 뒤에서 안락하게 수십년을 날았다"며 "네마리 용에게 좋으면서 나쁜 소식은 이제 그런 리더는 없다. 스스로 앞서 날아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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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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