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해소,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②

임금 내놓고 노사 매칭펀드로 격차해소 실험

2020-04-03 00:00:01 게재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사회 양극화로 확대 … 원인·해법 시각차에 30여년 논쟁만

개별기업 넘어 산별·지역별로 사회연대기금 조성 … 정부 매칭펀드·세제지원 필요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노동자의 소득이 높아지고 권리가 확대됐지만 격차가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시작된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 정·비정규직 간 차별적 고용관행은 한국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핵심과제가 됐다. 이런 가운데 최근 개별기업 노사 또는 산별단위 노사가 참여해 임금격차와 차별적 고용관행 개선은 물론 일자리 창출, 취약계층 지원 등에 나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노동계에 따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둘러싼 논란은 30여년 동안 계속됐다. 덕분에 노사정을 비롯해 전문가와 정치권은 물론 국민 대대수가 그 심각성을 알고 있다. 하지만 원인과 해법에 대한 시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견만 드러냈다.

일부에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가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과 복지를 저하시켜 격차를 야기한 주범이라고 비난한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이세종 전문위원은 "노동시장 격차의 원인을 전적으로 대기업 노조의 책임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면서 "재벌·대기업의 대응 전략이 대기업의 이윤은 고정시킨 채 비용을 중소기업에 전가했던 데 원인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시각은 노사관계를 과거로 회귀 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며 "이 보다는 과거 정부가 노조 교섭력 약화를 위해 추진했던 기업별 교섭체계가 더 큰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경제는 2015년 이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한 선진국들이 통과의례처럼 겪었던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저성장은 양질의 일자리를 줄였다. 이는 청년실업 증가와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차별적 고용관행으로 이어졌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한발 더 나아가 사회 양극화로 확대된 것이다.

◆"사회공헌 넘어 삶의 터전 지키려는 것" = 이런 가운데 양극화 해소를 위해 개별기업 노사가 손을 잡고 해소방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다행히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논란의 해결 가능성에 희망이 생긴 것이다.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노사가 손을 잡고 협력사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일자리 확대에 나서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지하철노조다.

지난해 부산지하철노조는 통상임금 소송 결과로 발생한 임금상승분 300억원과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추가 공휴일 수당 70억원 등 370억원을 신규인력 540명을 채용하는 재원으로 내놨다. 조합원들이 내놓은 몫은 1인당 평균 1000만원에 달한다.

앞서 부산지하철 노사는 임금 0.9% 인상, 신규인력 540명 채용에 합의했다. 합의를 주도한 최무덕 전 노조위원장은 "임금보다는 안전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며 "일자리 만들기는 정부와 자치단체 역할이라며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조합원 93%가 지지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일자리 부족으로 부산지역을 탈출하는 청년층 비율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며 "우리 결정은 사회공헌을 넘어 조합원들의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를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부산지하철노조는 지난해 전태일 열사의 '풀빵나눔 정신'을 실천한 사례로 꼽혀 '전태일노동상'을 수상했다. 풀빵정신은 전태일 열사가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하며 배를 곯던 시다나 미싱사들에게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늦은 밤 창동 집까지 걷고 뛰며 퇴근했던 일화에서 유래됐다. 전태일노동상 심사위원회는 "노동자에게 임금은 절대적인 삶의 방편으로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노력하지, 이를 깎거나 양보하긴 어렵다"면서 "하지만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풀빵정신) 부산지하철 노조는 그 힘든 결단을 행동으로 옮겼다"고 평가했다. 이어 "부산지역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하철 현장의 부족한 인력을 확보해 시민안전과 공공서비스 질을 개선하려는 주체적 노력"이라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 사례도 눈여겨볼만 하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2017년 임단협에서 기본급 1%를 사회적 상생을 위해 기부하기로 합의했다.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매월 기본급의 1%를 기부하면 회사도 같은 금액을 출연하는 방식으로 기금을 적립해 '1%행복나눔기금'을 조성했다. 2019년 말까지 107억2000만원이 적립됐다. 이 가운데 97억원을 협력사 상생 및 사회공헌 프로그램에 사용했다. 기금의 절반은 협력사에 전달해 하청노동자를 위해 사용한다. 올해 1월 28일 기금 전달식을 열고 60여개 협력사 4421명에게 23억6000만원을 전달했다. 노동자 간 임금·복지격차 축소를 위해 대기업 노사가 공동으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노사갈등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현대자동차 노사가 지난해에는 파업없이 임단협을 마무리했다. 8년만의 무분규 임단협이었다. 4차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자동차산업 지각변동 위기감이 노사의 힘을 모으게 했다.

한발 더 나아가 현대차 노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품 협력사를 지원하기 위한 '상생협력을 통한 자동차산업 발전 노사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공동 선언문은 차량용 부품·소재산업 지원과 육성을 통한 부품·소재 국산화에 매진해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협력사와 상생협력 활동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또 현대차 노사는 협력사가 물량 확보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협력사 운영과 연구개발(R&D) 비용 명목으로 925억원 규모의 대출 자금도 지원할 예정이다. 특히 현대차 노사는 9500명 규모로 진행 중인 사내 하도급 노동자 대상 특별고용에 대해서는 일정을 1년 앞당겨 올해까지 남은 채용(2000명)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저소득층·고용취약계층 지원하고 장학사업도 = 이런 개별기업의 노력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변화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산별단위에서 노사가 공익재단을 설립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저소득층·고용취약계층 지원 사업, 장학사업 등의 지원과 공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희망의 불씨를 더욱 키우고 있다.

지난해 6월 금융서비스 분야 노사가 노동시장의 불평등 문제 해소를 기치로 내걸고 함께 설립한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우분투'는 아프리카 코사족 언어로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연대정신을 의미한다.

앞서 4월 민주노총 산하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사무금융노조)는 사용자 측과 함께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하고 '사무금융 노·사 우분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기에 KB증권 KB국민카드 애큐온저축은행 교보증권 하나카드 신한생명보험 비씨카드 한국예탁결제원 한국증권금융 금융보안원 등 금융권 기업 및 기관 10곳이 참여해 노사가 함께 약 80억원의 사회연대기금을 출연했다.

재단은 △제2금융권 비정규직 실태조사 및 처우개선 연구 △비정규·간접고용 피고용자와 그 자녀를 위한 장학사업 △베트남 저소득층 주거환경 개선 △배달 노동자 자차 수리비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신필균 재단 이사장은 출범식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는 IMF 극복 과정에서 임시로 도입된 것이지만 지금은 제도적으로 고착화돼가고 있다"며 "재단은 노동시장에서 극심한 차별이 발생하는 소득 불평등 문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분투재단에 앞서 2018년 10월 금융분야 노사는 노사합의로 조성된 기금을 재원으로 '금융산업공익재단'을 출범했다. 재단 설립을 위해 한국노총 산하 전국금융산업노조(금융노조)는 2018년 임금인상분 2.6% 중 0.6%p를 재단기금으로 출연했으며 사측도 그에 상응하는 출연금을 내 1000억원을 조성했다.

여기에 2012년 2015년 2017년 노사가 함께 조성해 놓은 사회공헌기금 1000억원을 더해 전체 기금 규모를 2000억원으로 확대했다. 재단은 취약계층 고용안정 및 능력개발 사업, 소방방재청에 방화복 특수세탁기 지원, 일자리창출 아이디어 공모전 추진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영일 재단 운영위원(금융노조 부위원장)은 "임금 노동자인 우리 스스로 양극화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오랫동안 있었다"면서 "격차가 더 커져서는 안 된다는 조합원들의 우려가 바탕이 돼 설립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마다 400억원 가량을 사업에 투입하고 있다"면서 "다른 재단들에 비해 재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기득권 귀족노조 프레임서 벗어날 기회 = 지난 2017년에는 양대 노총 공공분야 5개 노조가 공공상생연대기금재단을 설립했다. 기금은 성과연봉제 폐지로 환수한 상여금 550억원으로 마련됐다. 재단은 △철도역사 어린이집 조성 △장학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또 제주 청년 직업교육 지원, 드라마 제작 노동자 지원, 직장 갑질 해결방식 개발, 창원 제조업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건립 지원 등에도 나서고 있다.

또한 지역형 사회연대기금도 등장했다. 지난해 재단법인 부산형 사회연대기금이 출범했다. 사회연대기금은 취약계층 지원사업, 소상공인 활성화 사업, 일자리 창출 및 청년취업 지원, 사회적기업 발굴 및 육성 등 부산지역 사회적 가치 향상을 위해 활동 중이다. 재단은 부산은행이 낸 10억원을 기본 재산으로 한다. 은행 임직원이 매월 급여 일부를 기부금으로 출연하고 해당 금액만큼 은행이 매칭하는 방식으로 매달 1억원을 추가로 출연한다. SK해운 노사도 3억원을 출연했다. 재단은 앞으로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한 활동에 동참하는 기업을 모집하는 등 기금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경사노위 관계자는 "한국의 노동자 간 임금소득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라며 "구조적인 이중경제와 분단 노동시장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물론 다양한 방식의 임금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노사정의 노력과 정부의 합리적인 정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어 "사내복지기금에 대한 세제 지원을 연대기금에 대한 지원 등으로 정책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면서 "특히 기금 마련시 정부의 매칭펀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경사노위 관계자는 "정규직 노동자 또는 대기업 노조가 기득권 귀족노조라는 비난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라면서 "오명을 씻고 국민들에게 다시 지지받을 수 있는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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