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후진국 탈출,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①

선택과 집중으로 산재 사망사고 줄인다

2020-05-29 11:10:34 게재

산업재해 사회적 패러다임 변화 요구

중대사고·사망사고부터 막는 게 중요

전체 사망자 절반이 건설현장서 발생

#1. 지난 4월 29일 경기 이천시 물류창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소방당국은 공사현장 내 우레탄폼 작업 중에 발생한 유증기(기름 증기)와 엘리베이터 설치 작업 중 튄 불꽃이 결합해 순식간에 폭발한 것으로 추정했다. 직접적인 원인만 놓고 보면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8년 이천시 냉동창고 화재와 유사하다. 당시에도 창고 지하에서 57명의 노동자가 전기배선 설치와 냉매 주입을 하던 중 전기용접을 위해 불을 붙이는 순간 공기 중에 차 있던 유증기가 폭발해 사고로 이어졌다.

#2. 지난 1월 인천 검단신도시 한 건설현장에서 20대 일용직 근로자가 70m 높이의 구조물 위에서 지상 3층으로 추락했다. A씨는 머리 등을 크게 다쳐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A씨는 사고 직전 아파트 24층 외벽에 설치된 거푸집 해체 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잇단 산업현장 사고로 국민 불안감이 커지면서 근본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노동자가 사망하는 이른바 '중대사고'로 인한 국민불안감이 커졌다.

'산재 사망자들을 추모합니다'│4월 27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산재사망대책마련공동캠페인단 주최로 열린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기자회견에 산재 사망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품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전문가들은 산업재해 사고를 바라보는 사회적 패러다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특별근로감독이나 관련업계 전수조사에 나서는 기존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선택과 집중을 기반으로 '나쁜 사고'만이라도 막자고 요구해왔다. 나쁜 사고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회복 불가능한 사고'를 의미한다.

잇단 사고와 전문가들의 지적에 문재인정부도 정책을 수정했다. 일부 논란도 있지만 새로운 방식의 산재 예방정책은 일정부분 성과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두용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사회에선 우선적으로 중대사고와 사망사고부터 막는 게 중요하다"면서 "정부도 산재예방 목표를 '사망사고'에 초점을 맞춘 것은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을 요구하고 있다'는 국민들이 보낸 신호를 정책에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책변화에는 인적·물적 한계라는 현실도 반영됐다. 제한된 감독인력 만으로 기본방식을 통한 안전관리체계를 개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근로감독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최근 4년 동안 근로감독관을 1100여명 늘렸다. 그럼에도 근로감독관 한 명이 담당하는 사업장 수(2018년 기준)는 1488개, 노동자는 1만3531명에 달한다. 특히 노동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산업안전근로감독관은 일반 근로감독관의 절반 수준이다.


◆사고사망만인율 선진국 수준으로 =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고용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사고가 많이 나는 곳 △사업대상이 명확한 곳 △사업내용 효과성이 명확한 추락, 충돌, 질식을 3대 악성 사망사고로 정했다. 나쁜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산업재해 사망사고의 주요 원인을 분석해 핵심분야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2022년까지 산업재해 사고사망자 수를 절반으로 감축하기로 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2017년 0.52였던 사고사망만인율을 0.27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사고사망만인율은 상시 노동자 1만명 당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말한다.

믿을 수 없는 현실│5월 1일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마련된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실제로 산재사망사고는 건설업 등 고위험 분야에 집중돼 있다. 2019년 발생한 산재사망자 중 428명이 건설업에서 발생했다. 이는 전년(485명) 대비 11.8% 감소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체 산재사망자 855명 중 절반 이상(50.1%)을 차지할 정도로 여전히 많다.

사고 유형별로는 '추락'사고가 40.6%(347명), 규모별로는 5~49인 사업장이 42.0%(359명), 연령별로는 60세 이상 노동자가 33.3%(285명)로 가장 많았다.


노동계 한 인사는 "전년에 비해 줄었다고 하지만 사망사고가 건설업 등에서 집중 발생되고 있어 종합적인 예방대책이 필요하다"면서 "정부 각 부처에 흩어져 있는 안전보건 정책을 총괄하고 안전보건을 책임지고 감독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안전보건공단은 사망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건설현장 추락사고를 단기간에 줄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 '현장순찰 점검(패트롤)'을 실시했다. 그 결과 2019년 산재사고사망자는 전년(971명)에 비해 전 업종에서 감소했다. 패트롤 방식의 사업역량을 집중한 건설업에서 가장 많은 57명이 감소했다. 이어 제조업에서 11명, 기타 다른 업종에서 48명이 줄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OECD 회원국 중 사고사망만인율이 높은 국가다. 선진국에 비해 적게는 2배 이상, 많게는 10배까지 높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만인률이 0.46를 기록한데 반해 일본(2018년 기준)은 0.17, 독일(2017년)은 0.09, 미국(2018년)은 0.31, 영국(2017년)은 0.08이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안전·보건과 환경에 대한 요구는 소득수준과 비례한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에서는 '환경의 일반화'가 시작되며 국민소득이 2만달러 수준이면 '안전'이 3만달러가 되면 '보건'이 일반화된다. 일반화란 국민들이 안전 보건 환경 등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여건에 맞는 투자용의와 권리의식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명목 GDP는 3만1682달러다. 하지만 국내 안전·보건 인프라는 2만달러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것이 전문가들 진단이다.

◆선택과 집중 계속된다 = 고용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선택과 집중' 정책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올해는 제조업으로 확대했다. 컨베이어 벨트·혼합기·식품제조용 설비·파쇄분쇄기·사출기·프레스·산업용 로봇 등 7대 위험기계를 보유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방호조치나 노동자 안전절차 인지 여부 등을 집중 점검할 예정이다. 특히 건설업에 적용했던 패트롤 점검·감독을 제조업까지 확대했다. 제조업 패트롤의 핵심대상은 상시노동자 50인 미만 사업장, '끼임'사망사고다.

최근 5년간(2014~2018년)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제조업에서 1168명의 사고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중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845명(72.3%)이 사망했다. 형별로는 끼임사고가 35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중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249명이 사망했다.

고용부는 영세·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자율적으로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소규모 사업장은 안전관리 정보나 인력이 열악해 점검 후 충분한 계도기간을 준다. 또 현장의 위험 기계설비에 방호울, 방호덮개 등 안전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하고 안전관리 조치를 위한 현장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정부는 원청의 책임이 대폭 강화된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올해 시행됨에 따라 앞으로 사망사고 감소에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산재 후진국 탈출,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연재기사]

한남진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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