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절박해진 87·97체제로부터의 탈출

2023-08-25 12:09:16 게재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

체제 문제를 꺼내면 뜬금없어 하는 사람이 많다. 냉전 해체 이후 우리 사회에서 거대담론을 회피하는 풍조가 만연한 탓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엄연히 체제가 작동해왔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87·97체제'다. 정치영역에서의 87체제와 경제영역에서의 97체제가 결합한 체제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제도권 틀 안에서 경쟁하는 87체제가 수립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우리 사회를 거대한 질곡에 빠트린 97체제가 수립되었다. 87·97체제는 30~40년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우리 사회를 일관되게 지배해왔다. 오늘날에 이르러 87·97체제는 곳곳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다.

97체제부터 살펴보자. 모두가 기억하고 있듯이 97체제가 작동하면서 중산층 붕괴와 함께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해왔다. 사회적 양극화는 다시금 세가지 위기를 파생시키면서 한국사회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97체제 작동하면서 사회 양극화 심화돼

첫째, 청년세대의 좌절. 사회적 양극화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신분 세습사회로 고착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계층 상승 사다리가 사라져가면서 청년들은 실망과 분노, 좌절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대의 45%가 이민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이상 이 나라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둘째, 생산성 정체. 한국생산성본부에 따르면 2014년 이후 노동생산성은 정체와 퇴보를 반복해왔다. 중국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하려 드는 상황에서 뜀박질해도 부족한 판국에 제자리걸음 하거나 뒷걸음질 친 셈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적 양극화와 무관할 수 없다. 사회적 양극화는 한편에서는 돈 놓고 돈 먹는 머니게임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을 철저하게 비용으로 취급하고 절감 대상으로 삼는 구조였다. 4차산업혁명 시기 생산성을 좌우하는 사람들의 의욕과 열정을 싸늘하게 식도록 만들었다. 패기와 열정을 발휘해야할 청년들이 의기소침하면서 상황은 결정적으로 악화했다.

셋째, 인구 및 지방소멸. 사회적 양극화는 지역 양극화를 수반했다. 돈과 좋은 일자리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청년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쏠렸다. 인재를 구하기 위해 기업들은 수도권으로 더욱 집중했다. 사람이 몰리다 보니 주거비와 교통비가 폭증했고 그 여파로 출산율이 크게 떨어졌다. 서울은 합계 출산율이 가장 낮은 0.5로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멸종위기에 직면한 도시다. 먹이를 찾아 서울로 갔는데 둥지가 없어 알을 못 낳는 꼴이다. 수도권이 초고도비만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데 반해 지방은 영양실조로 빈사상태로 놓여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국가가 소멸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다.

여기저기서 '피크 코리아'가 거론되고 있다. 선진국 진입이 엊그제 일이건만 곧바로 침몰위기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성년식을 마치자마자 기력이 쇠한 노인 꼴로 된 격이다. 97체제로부터 탈출이 더없이 절박한 상황이다.

문제는 앞장서 돌파구를 열어야 할 정치권에 있다. 정치권은 여야,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97체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정치권은 과거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에 도취해 낡은 이념대결에 골몰하고 있다. 안으로는 준내전 상태이며 밖으로는 신냉전의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모두가 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지도 모를 소모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흐름이다. 87체제 또한 97체제와 마찬가지로 서둘러 벗어나야 할 구시대 유물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2027년 대선엔 새로운 시대 열 수 있기를

다가오는 2027년은 87체제 40년, 97체제 30년째 되는 꺾어지는 해다. 국면 전환의 결절점이 되어야 하는 해다. 2027년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 2022년 대선은 미래비전을 둘러싼 다툼없이 네거티브만 난무했던 혼탁함이 극에 이른 최악의 선거였다. 절대 그 악몽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2027년 대선에서는 87·97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둘러싼 신선한 대결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확신컨대 지금부터 그에 맞도록 준비하는 세력이 미래정치의 주역이 될 것이다.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