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육성과 확보, 스위스 경쟁력 비결"

2023-11-20 11:25:11 게재

르몽드 "우수한 교육제도에 R&D 대거투자,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으로 경쟁력 높여"

스위스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비견되는 국가다. 인구는 적고 자원은 없다. 그럼에도 국가경쟁력은 월등하다. 인재육성과 연구개발(R&D)에 사활을 거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18일 '스위스 경쟁력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통해 우수한 교육시스템, R&D에 대한 막대한 투자, 스타트업을 돕는 생태계 등을 진단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스위스는 매년 GDP의 3.2%를 R&D에 투자한다. 이는 유럽 평균(2.15%)과 프랑스(2.35%)보다 높은 수치다. 스위스 GDP에서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프랑스의 2배인 25%다. 유럽특허청에 따르면 인구100만명당 특허출원건수는 2022년 1031건으로 스웨덴 482건, 프랑스 161건, 미국 142건에 비해 월등히 많다.

스위스 거대제약사 '노바티스' 로고를 배경으로 로봇 미니어처가 놓여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컨설팅기업 EY에 따르면 스위스는 지난 12년 동안 세계지식재산기구의 글로벌혁신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 거대제약사 로슈와 노바티스, 반도체기업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향료기업 지보단 등 14개 기업이 R&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글로벌 상위 500대그룹에 속해 있다. 여기에 3.7%에 불과한 실업률과 GDP의 5%에 달하는 높은 무역흑자를 더할 수 있다. 프리부르개발청의 제리 크라티거 이사는 "프리부르의 수출 호조는 대기업만큼이나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첨단분야 중소기업들의 네트워크 덕분"이라고 자랑했다. 의료기술과 정밀산업이 특히 주목받는 분야다.

기업가정신과 실용주의정신

인구 870만명이 26개주로 나뉘어 4개 언어를 사용하고 70%가 산으로 이뤄진 연방국가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스위스의 6대 혁신단지를 관장하는 '스위스 이노베이션' 재단의 소피 체르니는 "원자재가 없는 작은 영토이기 때문에 두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고 말했다.

향료제조 분야의 세계적인 선두주자인 지보단 CEO 질 앙드리에도 "스위스의 기업가정신과 실용주의정신은 인재제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확인했다. 고정밀 볼베어링 전문기업 'MPS'의 대표 니콜라 티보도는 "내수시장이 좁고 비용이 높은 스위스에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에서 판매하고 품질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인들은 교육에 크게 의존한다. 스위스는 광범위한 도제교육을 실시한다. 학생의 70%가 15세에 도제교육에 들어가 200개 이상의 직종에서 교육을 받는다. 높은 수준의 기술자가 등장한다. 플라스틱사출 전문 중소기업 '메카플라스트' 대표인 장 마크 자코테는 "115명 직원 중 상당수가 도제교육을 받았다.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흡수하는 능력이 매우 강해졌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원할 경우 응용기술 및 과학대학을 통해 일반교육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많은 관문이 있다. 또는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EPFZ)나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를 통해 일반교육에 복귀할 수도 있다. 이 두 대학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대들이다. 로잔연방공과대는 최고의 외국인 교수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며, 각 교수에게 프랑스대학보다 3배 높은 연구예산과 급여를 제공한다. 이 대학 경제학자 도미니크 포레이는 "스위스는 프로축구선수보다 교수에게 더 많은 급여를 주면서도 학생들의 학비는 낮게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스위스는 연구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캠퍼스와 산업단지는 학생과 연구자, 스타트업, 다국적기업을 한데 모으고 있다. 한 예로 직원 1만5000명을 고용하는 네덜란드기업 'VDL ETG'가 있다. 반도체용 온디맨드 산업 부품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올해 초 스위스 6개 혁신단지 중 하나인 이노바레에 자회사를 설립해 스위스 최고의 엔지니어링 연구센터인 '폴쉐러 인스티튜트'와 공동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다. VDL ETG의 글로벌매니저인 한스 프리엠은 "5~10년 후 어떤 혁신기술이 시장을 지배할지 알기 위해서는 미국 MIT, 싱가포르, 스위스 등 혁신기술이 부상하고 있는 세계 주요지역에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글은 약 15년 전 미국 외 지역 중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센터를 취리히에 설립해 약 50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스타트업들도 특별한 자금지원 모델 덕분에 최고의 연구센터들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 프로젝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소를 지정하면, 연간 예산 3억스위스프랑(약 4400억원)을 운용하는 스위스 혁신진흥기관 '이노스위스'가 두 기관의 파트너십 자금을 지원한다. 취리히연방공과대와 손잡고 식물단백질로 만든 육류를 판매하는 스타트업 '플랜티드(Planted)'의 공동설립자 크리스토프 제니는 "덕분에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었을 고가의 장비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이같은 자금지원 모델로 등장했다. 수중드론을 개발하는 '하이드로메아(Hydromea)'는 로잔연방공과대 연구소에서 탄생했다. 공동설립자 3명 중 2명은 독일인이고, 1명은 미국 MIT 출신이다. 설립자 중 한 명인 이고르 마틴은 "바다가 없는 스위스를 선택한 이유는 로잔의 로봇공학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캐나다 출신 엔지니어인 캐롤 플러머와 영국 출신 나이젤 월브릿지 역시 식물의 전기적 활동을 파악하는 스타트업 '비벤트(Vivent)'를 설립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스위스로 향했다. 플러머는 "스위스의 유연한 규제가 우리를 매료시켰다. 과도한 규제 없이 모든 것이 기업의 효율성에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유연한 규제

유연한 규제는 스위스가 자랑하는 또 다른 장점이다. 스위스 서부지역 개발기관 '그레이터 제네바 베른 에어리어'의 상무이사 토마스 본은 "스위스에는 관료주의나 상명하달식 산업정책이 없다. 모든 것이 지자체와 중소기업 등 아래에서 시작돼 위로 전달된다. 그리고 모든 결정이 매우 빠르게 이뤄진다"고 말했다. 취리히응용과학대학의 경제학자 틸만 슬렘벡은 "연방차원의 개입은 거의 없다. 많은 문제가 지역 주민투표로 해결된다. 국가의 주인은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라며 "이러한 특수성이 스위스의 합의문화, 안정적 문화를 촉진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기업 법인세가 상대적으로 낮다. 주에 따라 12%에서 20%에 이른다. 반면 주당 노동시간은 42시간으로 상대적으로 길다. 제네바 소재 픽테은행의 경제학자 나디아 가르비는 "이러한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스위스프랑 가치와 임금을 보완한다"고 말했다. 스위스 평균임금은 유로존보다 2.5배 높은 수준이지만, 총급여에서 고용주가 부담하는 비율은 약 15%로, 프랑스(약 40%)보다 낮다.

EU와의 관계정립 문제 남아

스위스의 강점이 많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볼베어링 기업 MPS의 티보도 대표는 "스타트업 탄생과 관련한 도제시스템은 훌륭하다. 하지만 성장과정에서의 지원은 그만큼 효과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 5년 전 로잔연방공과대에서 콘크리트의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촉매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나노젠스(Nanogence)'를 설립한 아비셰크 쿠마르도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스타트업을 설립할 때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쉽지만, 성장단계의 개발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미국과는 달리 훨씬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자회사를 설립해 바이든정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보조금 혜택을 받을 계획이다.

하지만 스위스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유럽연합(EU)과의 관계다. 스위스는 1992년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을 거부한 뒤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대신 EU와 인력,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 표준인정 등에 관한 일련의 부문별 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협정의 일부가 이제 유효기간을 넘겼다. EU는 주요 기본협정을 통해 이들 조약을 모두 정비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하지만 일부 스위스 정치인들이 유럽노동자의 스위스 유입에 따른 결과를 우려한 탓에 지난 2년 동안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은 낮지만 관세장벽이 부활하고 유럽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대폭 하락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스위스 기업들은 다소 긴장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약 1만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R&D에 대폭 투자하고 있는 노바티스는 "우리에게는 EU와의 관계 안정화가 절대적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프리부르개발청 크라티거 이사 역시 "EU와의 관계가 현재 스위스의 경제적, 교육적 경쟁력을 위협하는 주요 우려사항"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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