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사당화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2023-11-23 11:53:11 게재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인들도 정당명을 헷갈린다. 그럴 것이 한국 현대사에 너무나 많은 정당이 명멸했다. 그것도 엇비슷한 이름으로 말이다.

이른바 주요 보수정당이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광복이후 68개이다(나무위키 기준). 민주계열 정당은 44개이다. 정식 명칭이 '민주당'으로 존재했던 경우가 8차례이다. 한국 신한 통일 평화 새천년 열린 더불어 등 수식어와 함께 '민주'가 들어간 정당도 18개이다. 진보계열 정당도 55개이다.

대선이나 총선 전후 창당과 소멸 반복

그러니 여의도에 밝은 정치 고관여층도 정당사를 꿰기 어렵다. 특징이 있다면 대체로 대선이나 총선 전후 창당과 소멸의 길을 걸었다. 역대 대통령의 소속 정당명은 예외 없이 달랐다. 새로운 왕조라도 여는 것으로 여겼을까. 마치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평가에 부응하듯이 모두가 창당의 문을 열었다. 신장개업을 요란하게 떠들어도 주류 세력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대부분 자기 사람을 심는 기회로 삼은 거다. 그나마 구색 맞추기에 정치 신인들의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현재 여야 정당은 궤가 다르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영입해 대선에 성공한다. 비록 자신들이 배양하지 않았지만 적대적 합병과 비슷한 전략으로 여당이 된다. 나름대로 위인설당(爲人設黨)의 면면한 흐름을 끊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의 더불어민주당이 건재한 것도 상례와 다르다.

다른 시각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창당하는 대신 기존 정당을 접수해 "내부 총질하는 당 대표"를 정리하고 자신의 색깔로 바꾼 것도 결과적 위인설당이 아니냐는 거다. 민주당도 최근 친명(親明)과 비명(非明)의 갈등으로 사실상 '따로민주당'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판이 요동친다. 총선도 대선 못지않게 리모델링 혹은 신장개업 기회이다. 혁신과 쇄신을 내세우지만 모두가 안다. "물갈이 공천"이라고 쓰고 "내 사람 공천"으로 읽는다는 것을. 말이 시스템 공천이지 공천학살이라는 것을.

하지만 대권을 잡아도 원내 다수당을 놓치면 식물정권에 가깝다. 노태우가 3당 합당을 하고, 노무현이 연정의 필요성을 토로한 배경이다. 이러한 이합집산 총선에 변주곡이 탄생한다. 예컨대 1995년 12월6일 김영삼은 '1노2김'의 민자당을 깨고 신한국당을 창당한다. 이듬해 15대 총선 사령탑에 이회창을 영입한다. 자신과 갈등을 빚고 4개월 만에 총리직을 던진 그를 비례 1번에 선대위원장으로 앉힌다. 레임덕을 감수하며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로 등극시킨다. 그 결과 139석으로 원내 1당이 된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2000년 1월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DJP연합이 무너지며 위기에 몰리자 국민신당의 이인제를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한다. 이때 임종석 등 386이 들어오면서 115석으로 선방한다.

정당이 큰 정치인 배양하는 때 언제오나

17대 총선 코앞에서 분열한 노무현의 민주계열은 2003년 11월11일 47석으로 열린우리당을 꾸린다. 이듬해 3월12일 탄핵의 역풍으로 총선에서 152석 과반을 차지한다. 이른바 '탄돌이'이다. 15, 16, 17대 총선의 특징은 '적과의 동침'과 세대 교체였다. 적의 적은 나의 편이고, 장강은 뒤따라 오는 물결에 밀려난다는 거다. 이 같은 우여곡절에도 정당 민주주의가 제자리걸음하는 이유는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사당(私黨)화 때문이겠다.

여당 혁신위원장도 '나랏님'으로 부르는 제왕적 대통령은 대체로 철인(哲人)을 꿈꾸는 듯하다. 하지만 철인정치는 철권(鐵拳)통치와 한 뿌리이다. 비효율적이고 더디지만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주의가 군주제 대신 선택된 배경이다. 헌데 국민도 철인을 고대하는 걸까. 뜨거운 가슴보다 섬김의 마음보다 두뇌회전이 빠른 지도자 말이다. 국민을 섬기고 민의를 따르는 선출직에 고시출신이 너무 많다. 서울법대 고시출신들이 시험권력에 이어 선출권력까지 노리는 배경일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하지만 권력은 성적순인가. 미국의 경우 하버드대 학부 출신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이후 1명도 없다. 조 바이든은 델라웨어대, 도널드 트럼프는 펜실베니아대, 버락 오바마는 컬럼비아대이다. 일본의 80년대 이후 총리 21명 가운데 도쿄대 출신은 3명이다. 기시다 후미오는 와세다대, 스가 요시히데는 호세이대이다. 하버드대는 노벨상 수상자가 150명 도쿄대는 7명이다. 서울대는 0명이다.

로스쿨 출신 지도자라도 판검사 전력은 거의 없다. 모두가 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서민과 호흡한 경력을 내세운다. 헌신하는 뜨거운 가슴과 섬기는 자세가 필요한 거다. '벼락 정치'가 아니라 하원 상원 주지사를 거쳐 성장해 국민 무서움을 체득한다. 고관대작 벼슬을 앞세우는 우리 정치인들은 과연 서민과 공감능력이 얼마나 될까.

사당화가 민주주의 최대 적이다. 대통령이나 대권주자가 정당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당이 큰 정치인을 배양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됐다.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