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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공기업에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해야 하는 이유

2023-12-11 11:48:27 게재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은행들은 2008년 리먼브라더스 발 금융위기로 총체적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것을 교훈 삼아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ing)'를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가상적 위기상황에 대한 시스템의 내구력과 회복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시험이다. 은행의 경우 금리 환율 성장률 등 요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기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은행의 재무건전성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한다.

미국에서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은행은 주주에 대한 배당을 제한하고 나아가 추가 자본을 조달하고 비상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시스템적으로 중요한(systemically important), 다시 말해 대마불사(too big to fail)로 판단되는 은행들은 파산 시나리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비단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안정성 확보가 긴요한 IT 시스템과 원자력발전소에 대해서도 실시하고 있다.

전력공기업 재무상태 정크본드 수준일 것

우리나라 전력생태계에서 시스템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은 전기판매사업과 송배전사업을 겸업하는 한국전력공사, 그리고 발전자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전력공기업들이 현재 재무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물가당국을 위시한 정부당국의 강력한 전기요금 통제 정책으로 인해 한전은 계속적인 회사채 발행을 통해서만 하루하루 연명할 수 있는 실정이다. 한전에 전기를 팔아 수익을 얻는 발전자회사들의 재무상태 역시 녹록하지 않다. 발전자회사 소유 기저발전기들이 한전 재무상태에 연동되는 정산조정계수라는 미지의 산식을 통해 수익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벼랑 끝에 서 있는 전력공기업들이 지금이라도 당장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 재무적 자구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순이자 전력시스템의 안정성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조치다. 만약 전력공기업이 스트레스 테스트를 적기에 실시하지 않고 자구책을 적극적으로 수립하지 않는 경우, 이사들이 합리적인 내부통제시스템을 갖추고 운영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인정되어 법적 책임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업 워크아웃이나 회생절차에서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통상 제시되는 자구책으로는 주주에 대한 배당 제한은 물론 대주주에 대한 주식소각과 추가 출자 요구 등이 있다. 대주주에 대한 조치는 대주주가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전 이사회가 한전 재무상태 악화를 초래한 대주주 정부에 대해 한전 재무상태를 개선시키기 위한 상세 계획과 구체적 조치를 제시할 것을 요구해야 함은 그들의 최우선적 책무다.

이에 대해 현재 전력공기업의 회사채 발행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생존유지와 전력시스템 안정성 보장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상황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력공기업의 재무상태만 놓고 본다면 그들의 실질적 신용도는 진작 정크본드 수준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의 암묵적 보증을 통해 위기 시 채권을 변제할 수 있다는 채권자들의 믿음에 편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 어떤 법률, 그 어떤 공식 문서에서도 전력공기업의 빚을 납세자의 돈으로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다. 전력공기업 채권자들의 이러한 믿음은 법적 실체가 없는 집단환각에 불과하고, 전력공기업 이사회가 이러한 허구적 신용도를 바탕으로 경영을 이어가는 것은 심판의 순간이 닥쳤을 때 그들에 대한 면책사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국가와 납세자 담보로 불장난해서는 안돼

현재 전력공기업은 전대미문의 재무적 취약성 하에서도 자본확충 없이 빚을 늘리거나 심지어 주주배당 압박마저 받고 있다. 이것은 국가 전력시스템의 안정성과 납세자의 돈을 담보로 잡고 벌이는 불장난이다.

전력공기업 이사회가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정확하게 식별하고 자본확충 등 합리적 재무개선 방안을 수립 및 실행하는 것이 스스로의 법적 책임을 감면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전력시스템의 재무적 파탄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파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