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환율의 정치학

2023-12-11 11:50:15 게재
임종식 지경학 칼럼니스트
환율이란 한 나라의 화폐와 외국 화폐의 교환 비율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라 안의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권력관계가 숨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환율은 정치의 영역이다.

환율의 창 안에는 이익과 비용이 있으며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환율이 하락하면 수입상품 가격이 내려가 실질국민소득이 증가하지만, 소비자가 자국 상품을 외국 상품으로 대체함으로써 내수기업의 경쟁력이 저하한다. 반대로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상품의 외화표시 가격이 내려가 수출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지만 수입 상품의 가격이 올라가 국민의 실질소득이 감소한다.

국가간 권력 관계 내재된 환율은 '정치의 영역'

환율변동은 이처럼 국민경제 내부의 자원배분에 변화를 초래해 분배에 영향을 미친다. 수출기업 내수기업 수입업자 자영업자 소비자 농민 등은 환율의 향방에 따라서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특히 기축통화국과 비기축통화국 사이의 환율에는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기축통화국의 환율정책은 타국 경제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의 시발점이 된 1985년 플라자합의와 1995년 역플라자합의가 대표적인 사례다. 1997년 한국은 역플라자합의의 유탄을 맞아 외환위기를 겪었다.

환율정책의 선택지는 고정환율이냐 변동환율이냐, 강세 통화냐 약세 통화냐 등 비교적 단순하나, 최종 결정에 도달하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국제관계와 국내 문제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지, 사회 구성원 중 어느 그룹이 환율로 인해 이익을 얻고 어느 그룹이 피해를 볼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은 모든 국민의 이익을 골고루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논리를 중심으로 결정된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여러 성공 요인 중 하나도 자본축적을 위한 고환율 정책이었다. 심지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에는 일반 국민의 뇌리에 고환율 정책을 통한 외환보유액의 확충이 신앙처럼 자리 잡았다.

지난 11월 7일 미국 재무부는 7년 만에 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한 관계 학계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그러나 "수출 불황에 따른 경상수지 흑자 감소에 의한 결과" "강달러에 원화값 하락이 심해지자 외환당국이 달러를 매입할 요인이 적어져" "(원화가치를 올리기 위해 달러를 매도함으로써) '달러 방파제'인 외환보유액을 줄인 결과"라는 등 비판도 있다.

바야흐로 환율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개방경제의 성숙기에 접어든 한국경제가 성장 역량을 유지하려면 고환율 정책보다 저환율 정책에 기반한 실질국민소득의 증대 및 소비 진작을 통해 내수경기를 활성화하는 정책에 무게 중심을 둘 필요가 있다. 수출경쟁력은 고환율 정책보다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 제고로 획득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인 환율대책은 주변국과 평화·선린관계 강화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커진 환율변동성을 안정화하기 위한 정책도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의 '환율조작국'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시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등 환율주권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서 국제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역할보다 자국의 경제를 우선하는 보호주의적 성향을 점점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결제통화 및 외환준비금통화를 다양화하고 상시통화스왑계약의 체결을 확대하는 등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를 관리하기 위한 정책이 긴요하다. 더 근본적인 대책은 경상수지 흑자 또는 균형을 유지하고, 주변국과 정치·경제적으로 평화적 선린·협력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