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법칙 둔화 … 중국기업 추격 가속

2023-12-15 11:40:05 게재

닛케이아시아 "TSMC·삼성·인텔, 칩 소형화 한계 시험하는 가운데 중국은 지름길 모색"

대만 TSMC와 미국 인텔, 한국 삼성전자 등은 더 작고 빠른 칩을 만들기 위해 매년 수십억달러를 투자한다. 이들 3개 기업은 2025년까지 2nm 칩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칩의 성능이 지속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가까워지면서 선두그룹들이 중국 등 후발주자들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14일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TSMC 연구개발 책임자를 지낸 치앙샹이는 "무어의 법칙이 실제로 한계에 도달하면 반도체산업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며 "새로운 솔루션이 없다면 20년 뒤 반도체산업은 지금처럼 첨단산업이 아닌 전통산업이 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이러한 속도 둔화는 중국처럼 경쟁에서 뒤처진 국가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닛케이는 "반도체가 철강·플라스틱 산업처럼 상품화될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무어의 법칙 둔화는 이미 반도체산업과 지정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했다.


선두와 후발 좁혀진 격차

치앙의 예측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닛케이아시아 분석에 따르면, 인텔과 중국 최고 칩 제조업체인 중신궈지(SMIC) 간 기술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좁혀졌다. 인텔은 SMIC보다 최소 4~5년 이상 앞서 있었다. 칩 제조측면에서 2세대 이상에 해당한다. 이제 인텔은 약 3년, 즉 1세대 반 정도 앞섰다. 이는 미국의 수출규제 속에서 반도체역량을 발전시키려는 중국의 결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우려됐던 업계 선두주자들의 첨단혁신 둔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SMIC는 중국 최대 고객이자 최고 기술기업인 화웨이의 도움으로 현재 7nm 기술을 넘어 5nm 칩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TSMC와 삼성은 현재 3nm 칩을, 인텔은 5nm 칩을 생산하고 있다. 3개 업체 모두 2025년까지 2nm 칩을 생산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나노미터는 기술적으로 트랜지스터의 게이트 폭을 의미한다. 게이트가 작을수록 같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어 더 강력한 프로세서를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게이트를 작게 만드는 데엔 한계가 있다. 머지않아 더 이상 축소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기업들은 새로운 칩 아키텍처를 고안하고 물리학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텔은 2012년 2차원 구조의 트랜지스터를 '핀펫(FinFET)'이라 불리는 3D 구조로 전환한 최초의 기업이다. TSMC와 삼성도 곧 뒤를 따랐다. 이제 칩 제조업체들은 동일한 작은 표면적에 더 많은 컴퓨팅 성능을 집어넣기 위해 더 복잡한 트랜지스터 구조, 이른바 '게이트-올-어라운드(GAA)'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은 점점 더 비싸지고 있다. TSMC와 인텔, 삼성전자의 2022년 자본지출을 합치면 970억달러가 넘는다. 이는 유럽연합(EU)이 향후 10년간 반도체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지출할 예산의 2배 이상이다.

미국 반도체컨설팅기업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스' CEO 헨델 존스는 닛케이에 "비용구조가 속도를 늦추고 있다"며 "과거에는 2년마다, 지금은 3년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만 앞으로는 더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 경영진과 분석가들은 무어의 법칙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SMIC와 같은 후발기업들이 글로벌 리더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1세대에 1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얻게 됐다고 본다. 중국공학원의 우한밍은 "무어의 법칙 이후 반도체 성능의 성장이 둔화되면서 업계는 칩 성능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며 "이는 수년 동안 추격하던 중국에게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새로 펼쳐진 경쟁의 장

TSMC는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칩 소형화의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구개발 책임자였던 치앙은 패키징이 성능향상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한때 칩 패키징은 업계에서 집적회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만 여겨져 거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칩 제조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덜 까다로웠고, 트랜지스터 수를 늘리는 것만큼의 성능향상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앙은 메모리와 프로세서 등 서로 다른 유형의 칩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면 엄청난 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2009년 TSMC 창립자인 모리스 창에게 패키징 이니셔티브에 힘을 실어달라고 설득했고, 1억달러의 예산과 400명으로 구성된 팀을 배정받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성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처음 2년 동안은 기존 패키징에 비해 너무 비싸 어떤 고객도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지 않았다. 치앙은 "일부 TSMC 경영진은 내 제안이 한달에 웨이퍼 50장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사업으로 전락했다며 비웃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웃는 사람이 거의 없다. 칩 패키징은 이제 세계 최고 칩 제조업체들의 최신 전쟁터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인텔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첨단 패키징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플래그십 PC 칩셋의 아키텍처를 재설계했다. 중앙처리, AI컴퓨팅, 그래픽·데이터 전송 인터페이스를 담당하는 4개의 '타일'이 하나의 칩으로 결합돼 곧 출시될 예정이다.

오픈AI 챗GPT의 기반이 되는 엔비디아의 H100 칩셋은 이런 트렌드를 보여준다. 이 칩셋의 통합설계는 그래픽프로세서와 6개의 고대역폭 메모리칩을 직접 연결하며, TSMC가 제공하는 고급 패키징 기술을 사용한다.

2021년 인텔과 TSMC 등은 사상최대 규모의 칩 패키징 확장에 착수했다. 이 기술에 다년간 총 2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정부도 반도체 보조금 520억달러에 더해 칩 패키징 연구에 30억달러를 추가로 배정하는 등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리서치기관 IDC 추정에 따르면 새로운 유형의 칩 패키징 시장은 올해 437억달러에서 2028년 743억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웨이퍼에 여러 개의 칩을 적층하는 첨단 칩 패키징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유럽의 칩 제조업체인 NXP세미컨덕터스 최고기술책임자 라스 레거는 닛케이에 "디지털 컴퓨팅 분야에서 '패키징'이 많은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며 "이 모든 칩을 팬케이크처럼 쌓아서 3차원으로 만들고, 5nm칩 하나를 쌓고 그 위에 또 다른 칩을 쌓아서 패키지로 만들면 된다. 어린 시절 레고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절호의 기회 될까

중국 칩 제조업체들은 미국 제재로 첨단 제조장비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서 무어의 법칙의 더 가파른 감속세를 겪고 있다. 하지만 칩 패키징은 일반적으로 제조보다 기술적으로 덜 까다롭기 때문에 진입장벽과 발전장벽이 낮다.

엔비디아, AMD에 칩기판을 공급하는 '킨서스 인터커넥트 테크놀로지'의 한 임원은 닛케이에 "첨단 패키징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 첨단 패키징 기술을 사용해 7nm에서 5nm 또는 3nm급의 성능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며 "무어의 법칙이 둔화되는 지금이 중국 칩 제조업체가 선두업체와의 격차를 좁히기에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반도체 시설 건설기업 '노바 테크놀로지'의 사장 데이비드 마는 "칩 패키징의 등장이 중국에 잠재적인 호재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첨단 칩 패키징이 주요 테마가 된다면 당연히 중국에 또 다른 지름길이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반도체산업을 인텔 TSMC 삼성전자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SMIC 화웨이 등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했다. 중국에게 이 분야의 성공은 경제안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SMIC는 2020~2023년 자본지출에 240억달러를 투자했다. 같은 기간 총매출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상 최대규모 확장에 나섰다. SMIC는 TSMC와 삼성전자에 몸 담았던 반도체 베테랑 량멍쑹 공동 CEO가 이끄는 전담 연구개발팀을 통해 5nm 및 3nm 칩 생산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화웨이는 미국정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2019년 이후 4년 동안 연구개발에 약 5800억위안(809억9000만달러)을 쓸 정도로 강한 생존의지를 보였다.

화웨이의 반도체사업부인 하이실리콘은 2019~2020년 해외 공급업체와의 거래가 중단되기 전까지 TSMC에 5nm 칩 생산을 아웃소싱했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의 기술분석가인 브래디 왕은 "화웨이는 애플과 엔비디아 못지않게 첨단 칩을 설계하는 입증된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며 "화웨이는 중국 반도체 발전의 핵심동력"이라고 말했다.

해외 첨단 제조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면서 화웨이의 야망은 흔들렸다. 하지만 SMIC와의 협력을 통해 올해 5G 스마트폰 모바일 칩에서 놀라운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한 부활은 AI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화웨이가 자체개발한 AI 가속기는 중국에서 엔비디아의 지배력에 도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CEO인 젠슨 황은 화웨이를 '매우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부를 정도다.

중국정부의 지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2016년 발표된 중국 13차 5개년계획 문서는 '중국은 포스트 무어의 법칙 시대를 맞아 칩 제조 및 칩 패키징 수준을 높이는 등 개발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중국 과학기술부 고위관리인 치우강은 지난해 10월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중국은 집적회로 패키징 혁신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반도체장비 제조업체의 한 임원은 닛케이에 "중국은 해외의 대형 반도체 제조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면밀히 주시하면서 매우 공격적으로 칩 패키징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리적 한계, 무한한 욕구

물리학 법칙이 얼마나 빨리 초소형 트랜지스터를 종식시킬지 아직은 미지수다. TSMC 마크 리우 회장은 올해 9월 한 행사에서 "지난 50년 동안 반도체 기술 개발은 터널 안을 걷는 것과 같았다. 앞길은 분명했고 정해진 길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트랜지스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이제 우리는 터널의 출구에 도달했다. 반도체 기술 개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터널 너머에 더 많은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터널에 갇혀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누구도 무어의 법칙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인텔 팻 겔싱어 CEO는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지난달 타이베이의 한 행사에서 "트랜지스터 아키텍처와 패키징 및 배송 방식 모두에서 물리학을 구부리고 새로운 혁신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선도적인 제조업체들은 2년 내 달성 예상되는 2nm 칩을 넘어 이미 1.4nm 칩을 개발하고 있으며 2032년까지 1nm 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의 선도적인 연구기관인 IMEC이 2022년 도입한 새로운 트랜지스터 구조가 필요하다. 인텔 수석부사장 산제이 나타라잔은 "새로운 종류의 트랜지스터를 수직으로 쌓는 데 조기에 성공해 1nm 미만의 칩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 재료 제조업체 '엔테그리스'의 CTO 제임스 오닐은 닛케이에 "10년 전만 해도 3nm 칩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3nm 칩이 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ASML은 닛케이에 "무어의 법칙은 여러차례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같은 야망은 비용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스에 따르면 AI컴퓨팅을 실행하는 데 적합한 2nm 칩에 필요한 초기 투자액은 300억달러에 육박한다. 이는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마이크로컨트롤러 칩 공장을 짓는 것보다 10배나 많은 금액이다.

일본의 한 반도체 생산장비 제조사 임원은 "1nm 이후에도 계속 한계를 돌파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라며 "우리는 단순히 기술혁신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많은 자원과 투자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첨단 칩을 사용하는 애플의 경우 생산비용이 치솟고 있다. 아이폰 프로세서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맥킨지 수석파트너인 온드레이 버카키는 "트랜지스터당 비용이 낮아진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28nm에서 끝났다"며 "최첨단 칩은 점점 확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반도체 발전은 앞으로 고객에게 경제적으로 납득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반도체 황금기가 끝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 캐논의 한 관계자는 닛케이에 "최첨단 기술도 언젠가는 성숙한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디스플레이 산업 등 많은 산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반도체 산업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MIT 컴퓨터과학·인공지능연구소의 미래기술 연구 프로젝트 책임자인 닐 톰슨은 닛케이에 "프로세서 성능은 여전히 향상되고 있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컴퓨터 발전은 경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반도체 물리학을 넘어서는 후속기술에 기존의 수십, 수백배를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칩기판 공급업체인 AT&S의 최고기술책임자 피터 그리스니그는 "아직 초기기술인 양자컴퓨터가 미래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며 "특정 알고리즘을 위해 서버를 양자컴퓨터와 통합하면 향후 성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TSMC 연구개발 책임자였던 치앙은 닛케이에 "더 빠른 컴퓨팅을 위한 미래의 길은 반도체가 아닌 다른 기술이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실리콘 칩을 대체할 수 있고 컴퓨팅 성능을 계속 향상시킬 수 있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등장할 수 있다"며 "업계는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모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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