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올려 '탈디플레' … 반도체 부활 다급

2023-12-18 11:53:26 게재

법인세 세액공제로 화끈하게 보답 … "기시다 지지기반 취약, 증세 미루고 감세 일변도"

일본 내년 세제개편안 확정

경제·사회적 현실·과제 반영

일본 집권 자민당이 내년도(2024년 4월~2025년 3월 회계연도) 세제개편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국회 과반의석을 가진 자민-공명 연립여당의 개편안은 큰 수정없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세제개편안을 뜯어보면 현재 일본이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현실과 과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세제개편안은 일부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평가다. 임금을 인상하는 기업의 법인세를 깎아주고 일본 국내에 투자하는 기업에도 확실하게 보답하겠다는 의도다.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저출산 탈출을 위한 지원도 강화했지만, 최근 지지율이 급락하는 기시다 정권의 감세 일변도라는 비판도 나온다.


임금 7% 이상 인상하면 세액공제 25%

세제개편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기업이 임금을 많이 올릴수록 공제를 늘리는 제도다. 기시다정권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물가상승을 웃도는 임금인상'을 위한 조치다. 대기업의 경우 전년 대비 임금총액이 7% 이상 늘어나면 '증가분의 25%'를 법인세에서 공제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임금이 5% 이상 늘어난 기업은 증가분의 20%까지 공제받을 수 있다.

여성고용이나 승진, 저출산대책에도 적극적인 기업은 여기에 5%의 세액공제가 추가된다. 이에 따라 대기업은 기존에 있던 교육훈련비 증가에 대한 5% 세액공제까지 더해 최대 35%의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중소기업은 최대 45%까지 세액공제를 받는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이번 세제 개편안에서 적자가 나는 기업도 혜택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임금인상에 적극적인 중소기업은 5년의 기한내에 흑자가 나면 이월해서 세액공제를 받는다. 중소기업은 또 대기업과 달리 신규취업자 임금도 포함한 임금 총액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혜택의 폭이 넓어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24년 세제개편에서는 물가상승률을 웃도는 임금인상의 실현에 최우선 과제를 뒀다"면서 "임금인상이 비용이 아니라 투자이고,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발상으로 전환했다"고 분석했다.

일본정부가 임금인상에 적극 나서는 데는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탈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일본은 1990년 대비 2021년 말 기준 소비자물가가 11.3%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한국(166.4%)과 미국(107.4%)의 높은 물가상승률과 비교하면 심각한 디플레 경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도 최근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2022년 1월 대비 올해 8월까지 불과 20개월 만에 소비자물가가 5.6% 상승했다. 30년간 오른 물가의 절반치가 불과 1년 8개월 만에 이뤄진 셈이다. 문제는 물가가 빠르게 오르다 보니 실질임금이 감소하는 문제가 생겼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 10월 실질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2.3% 감소해 19개월 연속 내림세를 보였다.

물가상승을 웃도는 임금인상을 통해 실질임금을 올리고 민간소비를 촉진하는 것이 이번 세제개편의 목적이다. 일본정부는 지속적 임금인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코로나19 이후 공급망 불안에 따른 일시적 물가상승도 언제 꺼져버릴지 모른다는 디플레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 1장당 최대 27만원 감세

첨단산업의 일본내 투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도 담았다. 이번에 도입한 '전략분야 국내생산촉진제도'에 따라 다양한 세제 혜택을 준다. 대상은 △전기자동차(EV)와 이차전지 △반도체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해서 생산한 철강 '그린스틸' △식물 등에서 추출해 제조한 '그린케미컬' △재생항공연료(SAF) 등 5개 분야이다. 일본이 국가전략물자로 정해 공급망을 자체 소화하고, 외국으로의 유출도 엄격하게 관리하겠다는 품목이다.

구체적 세액공제를 살펴보면 △EV 1 대당 40만엔 △반도체 웨이퍼 1장당 최대 2만9000엔(약 27만원) △그린스틸 1톤당 2만엔 △그린케미컬 1톤당 5만엔 등이다. 국내생산기지에서 생산 또는 판매량 등을 최종 합산해 세액공제 규모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공제의 상한은 법인세 가운데 반도체는 20%, 나머지는 40%까지 받을 수 있다.

이번 세제의 특징은 또 설비투자 초기에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활동 전기간에 걸쳐 부담을 경감시켜 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업계획의 인정부터 10년에 걸쳐 세액공제를 받는다. 기업이 적자가 나더라도 흑자가 날 때까지 반도체는 3년, 나머지는 4년간 세액공제 혜택을 이월해준다. 중요전략물자는 공장설비 등 초기비용뿐만 아니라 전기요금과 원재료 등 비용이 많이 들고, 반도체나 이차전지 원료인 희토류 등은 가격 변동이 심해 기업 입장에서는 초기에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반영한 조치로 풀이된다.

일본 언론은 이번 세제개편안이 미국 바이든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차용한 것으로 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국내 생산을 조건으로 소비자가 EV를 구입할 때 1대당 7500달러를 공제해주고 있다"며 "IRA를 계기로 완성차 업체가 제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는 추세"라고 했다.

기업의 지식재산권 수입에 대한 세제 혜택도 새롭게 도입했다. 주요 대상은 △국내에서 연구개발한 지적재산권 매각에 따른 수입 △재적재산권 라이선스 수입 등이다. 다만 내년 4월 이후 취득한 특허권이나 저작권의 양도 또는 라이선스 수입으로 한정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 소득의 30%에 대해 과세소득에서 공제받을 수 있다.

이번 조치는 지식재산권의 해외유출을 막고 연구개발 거점을 일본 내에 유치하기 위한 목적이다. 실제로 일본의 연구개발비 증가율은 2010년 대비 2020년 기준 10% 증가에 그쳐 미국(50%)과 중국(140%)에 비해 크게 뒤졌다. 세계지적소유권기구(WIPO)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글로벌이노베이션지수'에서 일본은 13위에 머물렀다.

4인가구 최대 150만원 환급

세제개편안에서는 또 소비촉진과 저출산 대책도 강화했다. 납세자 1인당 소득세 3만엔(약 27만6000원)과 주민세 1만엔(약 9만2000원) 등 총 4만엔(약 36만8000원)을 정액으로 환급해주는 내용이다. 다만 연간 수입이 2000만엔(약 1억8400만원)을 넘는 고소득자는 제외된다. 특히 납세자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배우자와 자녀 2명인 가구의 경우 최대 16만엔(약 147만3000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대책도 내놨다. 감세액이 4만엔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감세+급부로 1인당 4만엔을 환급한다. 연간소득이 255만엔(약 2350만원) 미만으로 과세대상이 아닌 경우 가구당 10만엔(약 92만원)을 지원금으로 지급할 예정이다.

저출산대책의 일환으로 아이를 키우는 가구를 타깃으로 한 세금우대도 도입했다.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집을 살 때 소득세 등의 부담을 줄여주는 '주택론 감세'에서는 감세 대상 차입한도액의 상한을 보육세대에 한해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세금을 감면해 줄 예정이다.

한편 세제개편안이 감세로 일관하면서 세입 감소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방위비 증액을 위해 도입하기로 한 증세를 뒤로 미룬 점이다. 기시다정권은 지난해 방위력 증강의 일환으로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안팎인 방위비를 장기적으로 2% 수준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2027년까지 소득세와 법인세, 담배세를 올려 1조엔(약 9조2000억원) 이상 확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개편안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미 지난해 세법 개정안에서 "2024년 이후 적절한 시기에 도입할 것"이라고 했지만 올해도 2025년 시행은 빠졌다. 이에 따라 자민당 내부에서도 "소득세와 법인세를 깎아주면서 방위비를 늘리겠다는 것은 액셀과 브레이크를 함께 밟겠다는 것"이라는 비판과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일본 언론은 이번 세제개편안이 기시다정권의 낮은 지지율 등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5일 "개인과 기업의 세 부담을 경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며 "여당의 세제조사회가 '증세이미지'를 지우고 싶어하는 기시다 총리의 의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사히신문도 이날 "세금부담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뒤로 미루고 감세 메뉴만 넘쳐난다"면서 "지지율 하락이 계속되는 가운데 감세로 국민과 기업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기시다정권의 의도가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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