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와 카이스트

2023-12-19 11:40:03 게재
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실리콘밸리 생활을 마무리하려니 자연스레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3년 근무를 하나의 생물(生物)로 보면 필자가 누린 시공간이 이제 소멸을 앞두고 있다. 소멸은 죽음이고 죽음은 새로운 탄생과 맞닿아 있다. 실리콘밸리가 그렇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과수원 지대가 소멸하고 세계 첨단산업을 이끄는 실리콘밸리가 탄생했다. 실리콘밸리는 언제 태어났을까. 토박이들의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이방인 처지에서는 공인된 근거가 필요하다. 캘리포니아주의 공식 입장을 따른다.

1987년 8월 13일 캘리포니아 공원·휴양지관리국은 팔로알토 애디슨 애비뉴 367번지를 사적 976호로 지정했다. 이 역사적 건물의 명칭은 '실리콘밸리 탄생지(Birthplace of "Silicon Valley")'다. 건물 앞에 설치된 동판에는 실리콘밸리에 일부러 큰따옴표를 붙였다. 영미권 사람들이 입말로 발음할 때는 분명 실리콘밸리 앞에서 양손으로 브이(V) 자를 그리는 제스처를 취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리콘밸리가 탄생한 때와 실리콘밸리라는 표현이 등장한 시점은 30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휴렛팩커드 창업이 실리콘밸리 시작

'실리콘밸리' 이름의 묵시적 저작권은 미국 언론인 돈 호플러(Don Hoefler)가 갖고 있다. 그는 1970년 1월 11일 전자뉴스(Electronic News) 신문에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반도체산업 부흥을 다루면서 '미합중국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U.S.A.)'라고 익살스러운 제목을 붙인다. 과수원 지대였던 산타클라라 밸리가 반도체산업의 중심으로 재탄생하는 움직임을 다룬 3부작 시리즈의 첫번째 기사였다. 1970년 1월 11일이다. 근무 틈틈이 여러 사료를 축적하면서 숫자를 틀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실리콘밸리 표현이 등장한 기사의 게재일을 1971년으로 잘못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마운틴뷰에 있는 '컴퓨터 히스토리 박물관(CHM)'의 온라인 페이지도 1970년 1월 11일 기사를 올려놓고 1971년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명칭이 등장하기 32년 4개월 전으로 시계를 돌린다. 1937년 8월 23일, 두 명의 젊은이가 조만간 회사를 세우기로 큰 틀에서 합의한다. 회의록도 남겼다. 제목은 '계획 중인 기업의 잠정적 조직 계획과 잠정적 업무 프로그램(Tentative organization plans and tentative work program for proposed business venture)'이었다. 두 명의 젊은이는 윌리엄 휼릿과 데이비드 패커드다. 둘의 이날 만남으로 휴렛팩커드(HP)가 태동했다. 휴렛팩커드가 움트면서 실리콘밸리도 싹텄다.

사실 이 자리에는 한명이 더 있었다. 훗날 휴렛팩커드의 제조 책임으로 합류하는 '노엘 포터(Noel Porter)'까지 참석자는 셋이었다. 그는 에어컨디셔닝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휴렛팩커드의 최종 창업자 명단에서는 빠졌다. 1937년 잠정적 합의를 이룬 휼릿과 팩커드는 이듬해 8월, 팔로알토 애디슨 애비뉴 367번지 차고에 주파수 발진기(audio oscillator)를 만드는 작업실을 꾸린다. 이곳이 바로 캘리포니아주가 사적 976호로 지정한 '실리콘밸리 탄생지'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프레드 터먼

실리콘밸리 탄생의 뿌리가 된 인물은 누가 뭐래도 프레드 터먼(Fred Terman)이다. 1900년 6월에 태어난 그는 1982년 12월에 사망했다. 터먼은 20세기 중반, 스탠퍼드대학의 공과대학장과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그의 인생을 연대기로 정리한 책이 2004년 스탠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됐다. 웨슬리안 대학 역사과학 교수인 스튜어트 길모어가 작업한 이 전기의 제목은 '스탠퍼드의 프레드 터먼: 체계를 만들고, 대학을 만들고, 실리콘밸리를 만들다(Fred Terman at Stanfod: Building a Discipline, a University, and Silicon Valley)'이다. 아직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은 책의 첫장은 시작부터 터먼을 '캘리포니아 소년(California Boy)'으로 정의한다.

프레드 터먼은 어린 시절 스탠퍼드대학 캠퍼스에서 뛰놀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스탠퍼드대학 심리학과 학장을 지낸 루이스 터먼이다. 루이스 터먼은 유럽에서 지능지수(IQ) 검사를 도입해 미국식으로 개정하고 세계에 전파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시대에는 우생학을 옹호한 사람으로서 많은 비판도 받는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일터에서 성장한 프레드 터먼은 성인이 되어서도 캘리포니아의 정체성을 사랑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일하면서도 언젠가는 스탠퍼드로 돌아와 자신이 자란 지역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스탠퍼드대학 전기공학 교수가 되어서도 그는 학생들이 졸업 후 동부로 가는 풍토를 마뜩잖게 여겼다. 서부에서 창업하기를 권했고 직접 발로 뛰면서 종잣돈까지 마련했다. 휴렛팩커드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제자 윌리엄 휼릿과 데이비드 팩커드를 위해 초기 자본금 538달러를 유치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만달러가 넘는 큰 금액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별칭은 '실리콘밸리의 아버지(Father of Silicon Valley)'다. 이는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생각하면 반쪽짜리 별명이다. 프레드 터먼은 실리콘밸리가 탄생하도록 씨앗을 뿌린 동시에 미국 밖에도 혁신 생태계가 생겨나도록 산파 역할을 했다. 대표적 사례가 카이스트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이다. 상기한 전기 '스탠퍼드의 프레드 터먼'의 마지막 장은 터먼이 스탠퍼드대학에서 은퇴한 이후를 다룬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프레드 터먼이 가장 공들인 일은 실리콘밸리에서 확립한 체계를 한국에 이식하고 적용하는 일이었다.

실리콘밸리 체계 한국에 이식한 터먼

1970년 7월, 산업발전에 필요한 이공계 전문 대학원을 설립하는 '한국과학원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우리 정부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 본격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스탠퍼드대학 전기공학 교수 출신으로 닉슨행정부에서 과학자문관으로 일하던 휴버트 헤프너(Hubert Heffner)는 한국 실사단을 이끌 인물로 프레드 터먼을 적극 추천한다. 결국 터먼이 단장으로 낙점되고 이후 터먼은 1970년 8월, 3주 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를 시작으로 터먼은 5년에 걸쳐 다섯번이나 한국에 온다.

1970년 12월 마침내 노력의 결과물이 나왔다. 제목은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 보고서'다. 흔히 '터먼 보고서(Terman Report)'로 알려져 있다. 국가기록원에서 온라인으로도 찾아볼 수 있는 이 보고서 표지에는 실사단 5명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단장은 프레드 터먼이다. 단원은 도널드 베네딕트, 정근모, 프랭클린 롱, 토머스 마틴이다.

실사단은 보고서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단원들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심각한 질병에 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결국 단장 프레드 터먼이 조사보고서의 많은 부분을 직접 쓸 수밖에 없었다. 터먼은 보고서 작업을 하며 "과학기술 교육은 실생활을 구성하는 산업과 동떨어져서는 안된다"고 전제한다. 또한 "한국의 과학기술 교육은 실천가(doer)를 양성해야 한다"며 한국과학원의 목적과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과학원 커리큘럼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과정이 빠진 것을 알고 크게 우려했다.

보고서 끝부분에 터먼의 신념이 잘 드러난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장래의 꿈'이다. 이 장은 "서기 2000년 우리는 매우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시작해 "한국은 모든 개발도상국에게 자극을 주고 희망과 기대가 한데 뭉친 하나의 귀감이 될 것이다"로 마친다. 그동안 보고서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꿈 희망 기대 귀감 말이다. 서기 2023년 12월, 여전히 터먼 보고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